독서 2010. 6. 18. 02:00




중학교 갈 무렵 유시민씨가 쓴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읽었다.
그 때의 나는 바로가는? 세계사도 몰랐던 때이기에 이것이 왜 거꾸로 보는 것인지도 몰랐으니..
언니들이 사모았던 유시민씨와 유홍준씨의 책들은 빈약한 나의 인문학적 소양에 간간히 투여되던 고단백 영양식이었던 듯 싶다.
역사와 사회를 보는 참신한 눈을 거부감없이 읽을 수 있을만한 환경의 특혜 쯤이라고 해야 겠다.

이 책은 자연인?으로서 유시민의 보여준 글이라 마음에 든다.
아직 정치를 하고 나랏일을 하던 때가 아니라 조심성이 많이 빠진 이 글이 참 맘에 든다.
대한민국 개조론은 문체마저 경어체이고, 마치 사춘기 소년이 갑자기 취직한 듯..
중립과 통합 속에서 고민한 흔적이 보여 조금 안쓰럽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좋은말만 하고 쓴소리는 삼키려 하기에 할 말을 다 못한- 사실 궁금했더 말을 다 못들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좀 피곤할진 몰라도 신뢰가 갈 것 같아서 무서울 게 없을 거 같아서 참 좋았는데..
이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하고 글을 쓴지가 벌써 10년이 넘었다.

정치권으로 흡수되어 들어간 후..내 생애에서 가장 바쁜 날들과 겹쳐 그동안 이 사람도 변화와 진화를 거듭해 왔다는게  조금은 낯설다.  전공책 사이에서 다른 책들을 밀어낸 후 총선 때문에 오랫만에 이 사람을 다시 마주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의 글을 읽을 때보다 더 조심스레 더 꼼꼼히 검증한 후에..
이 사람의 지지자가 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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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일사분란주의', '국론통일주의', '발본색원주의', 그리고 '광신적 반공주의'와 '연고주의'를 몰아내지 않고서는 민주주의도 사회정의도 제대로 실현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나는 이책에서 더러는 진짜 내 생각보다 더 과격한 견해를 일부러 내놓기도 했다.

- 적지 않은 경제적, 가정적 어려움을 무릅쓰고 내가 독립적인 지식인으로 살아가도록 비판하고 격려해주는 아내 한경혜에 대한 고마움만은 꼭 한마디 적지 않을 수가 없다.


생각의 감옥부로부터의 해방

자유주의자는 부당한 권위에 복종하지 않으며 집단의 위세 앞에 주눅들지 않는다. 술자리의 안주감으로 씹히고 괘씸죄로 걸려도 어쩔 수가 없다. 어느 시대든 신조를 지키는 데는 언제나 비용이 따르는 법이 아니겠는가?


- 자유주의자는 사상과 견해의 다양성을 존중한다......그래서 사회를 하나의 지배적인 사상에 복속시키려는 시도에 단호하게 반대한다. 특히 법률과 폭력을 동원해서 국민에게 특정한 사상과 견해를 강요하는 국가권력에 대해서는 저항과 불복종으로 맞선다. 그러면 국가권력은 그들을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좌익분자' '급진세력'이라는 이름을 붙여 가두고, 추방하고, 박해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한다. 자기가 자유주의자라고 항변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 " 리버럴한liberal  건 좋다. 하지만 리버럴리즘liberalism은 개떡이다. 민족적인national한 건 환영한다. 그러나 민족주의nationalism은 밥맛이다. 매사를 사회적인social 관점에서 보는 건 좋다. 그렇지만 사회주의socialism는 사양한다. "

- 공산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환경주의자, 자유주의자, 그리고 보수주의자가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경쟁하는 유럽의 민주주의 선진국에서 자신과는 다른 사상을 가진 사람의 존재를 존중하는 자유주의적 태도는 모든 '주의자'의 기본이다. 이 기본을 갖추지 못한 세력은 '극좌'와 '극우'로 분류된다. .................좌파의 모든 '주의자' 들은 극좡와의 연대를 거부한다. 우파의 모든 '주의자' 들도 극우와의 제휴를 거부한다.

- 진짜 자유주의자는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전면적인 자유의 실현을 위해 싸운다. 경제적 자유를 허용하면서 정치적, 문화적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는 존재할 수 없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로 성립한다.
앞으로 할 이야기는 모두 이런 관점에서 쓴 것이다.

- 나는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국익을 위하여'를 외치지 않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이승만과 박정희 씨는 '북진통일' '멸공통일' '국가안보' 라는 국익을 내세워 국민들의 자유를 박탈하고 시민의 권리를 빼앗았다. 경제성장이라는 국익을 앞세워 노동자의 파업권을 말살하고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봉쇄했다. 전두환씨와 노태우 씨는 국익을 위하여 수천명을 살상했고 천문학적인 액수의 '통치자금'을 조성했다. 김영삼 씨는 '구국'의 일념으로 3당합당을 감행했고 그 아들은, 적어도 주관적으로는 국익을 위해 일한 죄로 감옥에 갔다.

- 나는 국민 개개인의 이익을 다 합친 것이 국익이라고 생각하낟.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개인의 개별적 이익과는 구별되는 다른 차원의 국익이라는 것이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지난날 권력자들이 "국익을 위하여"라는 명분 아래 저질렀던 숱한 독선과 오만을 나는 아직 잊지 않았다. 

-  힘의 집중을 추구하는 것은 권력의 본질적 속성이다. 독선이 권력과 결합하면 '국익을 해치는 세력을 발본색원하여 국론을 통일하고 일사불란하게 내외의 도전에 총화단결 응전'하기 위해 국민의 입과 귀를 틀어막는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 제대로 된 자유주의자는 자신의 사상 그 자체보다도 그 사상를 표현할 수 잇는 자유를 더 소중히 여긴다. 나는 보수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진 않지만 그가 그 사상 때문에 탄압을 받는다면 그와 연대해 싸울 각오가 되어 있다.
 
- 이제 그와 같은 함정, 스스로 팠거나 극우세력이 파놓은 함정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한마디를 보수를 극우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자유민주주의를 극우에서 해방시키자는 말이다. 한국에선 반세기 동안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던 극우세력이 스스로 보수라 칭했고 더욱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킨다고 말해왔다 <홍세화>

- 극우는 극좌와 마찬가지로 보수와 진보가 공존할 수 있는 사상의 자유시장과 민주적 기본 질서를 파괴한다.
극좌와 극우는 민주주의의 적이다.

- 충무포럼의 자유주의는 자본주의 시장에서의 경제행위의 자유에 절대적인 비중을 둘 뿐, 다양한 가치관과 사상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는 그런 자유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 순수 시장경제에 대한 인위적 규제의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담고 잇는 사상과 사회운동에 대한 강력한 거부감이 이 경제적 자유주의의 반자유주의적 성격을 분명히 보여준다.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 1998>

- 고문 범죄자를 고문하지 않는다고 민주화가 된 건 아니다. 고문조작의 진상과 책임자를 규명하고 피해자에게 합당한 배상을 해야 제대로 된 민주사회라 할 수 있다.

- 온 사회를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복속시키려고 하는 개인과 정치세력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법률과 폭력의 심을 빌어 사상과 견해의 다양성을 말살하기 위해 "없는 사실을 조직"하는 전체주의적 언행은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 대한민국 국민은 법률에 어긋나지만 않으면 자기 돈으로 무슨 일이든 다 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
   그러나 나는 정부가 그 일에 국고를 지원하는 데는 결단코 반대한다. 박정희를 숭배할 자유가 있다면 당연히 비판할 자유도 있다. 정부가 지원하려는 국고에는 박정희를 민주주의를 파괴한 독재자로 규정하는 사람이 낸 세금도 들어있다. 이 돈을 기념관 건립자금으로 주는 것은 이런 사람들의 재산권에 대한 침해이고 세계관에 대한 모욕이다. .............아직도 피가 흐르는 파시즘의 상처를 그대로 둔 채 가해자를 기리는 조형물을 만드는 터무니없는 짓에는 단 한푼의 세금도 보태고 싶지 않다.

- 북한 텔레비전 방송이 던져준 의문 때문이었다. 나라의 주인이요, 역사의 주체라고 주장하면서 그 인민대중에게 사회와 국가의중대한 문제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주지 않는 나라가 '좋은 나라'일 수 있는 것일까?

- 당신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확고한 안보태세는 국민 개개인이 북한 사회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많은 모순과 부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체제를 고치고 다듬는 쪽이 훨씬 낫다는 확신을 가지면 저절로 이루어진다. 전문적으로 국가안보를 팔아먹고 사는 장사꾼들이 없어져도 국가안보에는 아무 이상도 없다.

- 민족주의적 친북성향이 도가 지나치면 곤란한 상황이 발생한다. 국가권력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다른 요소들을 무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권력의 절차적 정통성과 경제적 능력이 그것이다. 김일성이 항일 무장투쟁을 했다고 해서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인민의 자유를 박탈할 권리가 있는 건 아니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봉쇄하고 정치적 반대파의 존재를 말살한 북한 체제는 절차적 정통성을 갖추고 있지 않다. ............략...................그 다음은 체제의 경제적 능력이다. 아무리 민족사적, 절차적 정통성이 있는 권력이라도 국민을 잘 살게 하지 못하면 몰락의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자연재해를 극복할 역량조차 없이 속수무책 제 국민을 굶겨 죽이는 북한 정권의 지도부는 범죄자라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대한민국의 헌법은 사상의 자유를 보장한다. 인간이 하는 일 가운데 절대적으로 옳거나 틀린 것은 없다. 한 점의 오류도 없는 사상이나 단 한 톨의 진실도 담지 않은 사상은 없다. 사상의 자유가 필요한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세상을 보는 눈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는 상이한 여러 사상 사이의 대립과 경쟁을 거쳐야 알 수 있다. 어떤 사상이 잘못된 것인지 아닌지 선험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사상의 자유는 당연히 잘못된 사상을 가지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포함한다. 폭력을 써서 자신의 사상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한 어떤 사상이라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사상의 자유다.

-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의 토론과 상호비판, 그리고 자신의 이론과 경험에 대한 성찰을 거치지 않은 사상의 변화는 모두 '강제된 전향' 일 뿐, 사상의 변화라 할 수 업삳.

- 정말로 주사파의 소멸을 확인하고 싶다면 그들에게 자유롭게 주체사상을 찬양할 자유를 허용하라. ...... 주사파에게 발언의 자유를 무제한적으로 허용하는데도 주사파를 자처하는 사람이 없을 때, 그때서야 당신들은 주사파의 소멸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문제는 원래부터 북한 텔레비전 방송 그 자체가 아니라 그에 대처하는 우리의 의식과 태도에 있다. 우리 국민들은 민주주의의 기본 질서를 소중하게 여긴다. 그런데 '안보 담당자'들은 여전히 '냉전의식이라는 정신적 감옥'에 들어앉아 쓸데없는 사회적 긴장을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 사실 진보는 극좌보다 보수와 잘 어울리고 보수는 극우보다 진보와 사이좋게 지내는 편이 맞다.

- 극단주의 정치세력은 언제나 '적'의 단점과 오류에 대한 비판과 비난을 자신의 사상을 정당화하는 '유일한' 근거로 삼는다. 극좌는 '자본주의 악덕과 제국주의 침략 분쇄'를 명분으로 삼아 자신들이 저지른 모든 형태의 범죄를 정당화 햇
다. 극우가 '공산주의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저지'라는 명분아래 합리화 하지 못한 범죄는 없다. 그들은 '우리 편이 아니면 모두 적'이라고 믿는 점에서 배짱이 맞는 호적수다.

- 진짜 자유주의자는 자기가 사는 사회의 극단주의 정치세력과 싸운다.

- 파시스트의 이상향도 '한 사람의 양치기와 수천 마리의 양떼로 이루어진 전체주의 사회'다. 이런 사회를 조직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 우선 양치기는 '지도자의 천분을 타고난 영웅'이어야 하고(영웅주의), 양은 개체로서가 아니라 양떼 전체의 일원으로서만 생존의 근거를 가질 수 있으며(국가주의와 집단주의, 개인의 권리와 개성에 대한 억압의 합리화), 양치기의 '지도방침'에 대해 시비를 가리려는 양은 가차없이 축출해야 하고(지식인 박해와 표현의 자유 박탈 정당화), 암양은 군말 없이 숫양의 꽁무니를 따라야 하며(가부장주의와 반여성주의), 양들의 불복종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감시와 폭력적 처벌 시스템을 항속적으로 유지해야 하고(사상검증과 감시의 일상화, 국가 폭력의옹호), 양들이 '자랑과 기쁨'을 가지고 양치기의 '지도'에 순응하도록 집단적 과대망상을 주입해야 한다. (우월적 인종주의)

- 글은 말에 비해 더 진지하고 근엄한 것으로 간주돼왔다. 그러나 그간 글에 주어져 왔던 그런 우월한 지위는 이제 박탈되어 마땅하다. 글은 이제 더이상 지식인의 전유물이 아미녀, 활자화된 글도 이제 모든 대중이 주체로서 스스로 생산해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글과 말은 좀더 상호 근접할 필요가 있으며, 말로는 할 수 있었지만 글로는 그대로 쓸 수 없었던 이야기도 글로 쓰자는 게 내 생각이다. 
  표현의 자유에 불가피하게 가해질 수 밖에 없는 최소한의 법적 규제를 준수하는 선에서 글은 좀 더 자유롭게 말, 아니 생각까지 그대로 표현해낼 수 있어야 한다. 커뮤니케이션의 진정한 민주화를 이룩하고 삶과 커뮤니케이션의 상호 소외를 막기 위해서다.             <강준만,  지식인의 생명은 자기 성찰 중> 

- 진짜 자유주의자들의 글쓰기 (김정란 강준만 진중권..)

: '나'를 앞세워 글을 쓰면서 다른 지식인을 구체적으 지목해서 비판한다.....집단과 조직과 간판 뒤에 몸을 숨긴채 목소리만 들려주거나 누구를 가리키는지 특정하지 않은 채 추상적으로 특정한 사상이나 이론, 조지과 집단을 비판하는 것이 보통인 문화 풍토에서 '개인의 등장'은 새롭고 의미있는 현상이다. 자유주의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사회와 집단의선택과 책임을 줄이고 개인의 선태과 책임을 확장할 것을 요구한다.

:극우 파시즘과 사상적 친화성을 보이는 문화권력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동시에 좌파에 대해서도 극좌적 경향성을 비판한다.

:나름의 개성과 신념을 기반으로 '좌 우파 자유주의자들의 자유로운 연대'를 추진하고 있다.

- 경제학은 돈에 관한 학문이 아니라 인간에 관한 학문이다.

- 우리는 여러가지 형태의 '죄수의 딜레마'에 갇혀서 살고 있다. 그래서 이 모델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목격하는 갖가지 '멍청한 사태'의 원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대표적인 사례가 환경오염이다......이기적 개인의 '합리적 행동'은 환경 오염이라는 공동선의 파괴로 귀착된다.......이 비용을 '이타적 선호'를 가진 사람들만 치르게 하면서, 그 덕분에 개선된 환경의 혜택은 모두가 누리게 하는 것은 명백히 '경제정의'에 어긋난다.

- 우리의 민주주의는, '남'들은 가만히 있는데도 '나'는 싸워야 한다는 '미련한 선택'을 한 '비합리적인 인간'들의 피눈물(이것이 '비용'이라는 '천박한 용어'에 담긴 내용이다)을 자먹고 자란 나무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이 '미련한 인간들'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다. 이 빚을 확실하게 같아야만 우리 사회가 또다시 파시증의 덫에 걸릴 경우 옛날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이 처자식의 앞날을 걱정하지 않고 기꺼이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투쟁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시장' 의 미덕과 악덕

시장과 국가는 서로 대립하면서 의존한다. 시장은 국가가 만든 제도의 틀을 벗어나 존재할 수 없으며, 자의적 규제와 개입으로 시장의 원리를 왜곡하는 국가는 몰락의 화를 피할 수 없다.

- 충족하고자 하는 욕망에 한계가 없는 것처럼 이윤 추구에 눈면 개인이 사용하는 수단 방법에도 한계가 없다.

- 시장경제는 내버려두어도 잘 번창하는 들꽃이 아니다.

- 재벌의 사업 맞교환(빅딜) 추진정책은 단기적으로 아무 효과도 없다...........부실기업과 다른 부실기업을 합친다고 해서 국제경쟁력이 높아지거나 일자리가 생길 리 없다.

- 정부는 가계의 소비 의사결정에 시시콜콜 개입하려는 쓸데없는 일을 그만두고 내수시장의 거대 경제주체답게 '큰소노릇'을 제대로 해야 한다. ..........가계의 소비를 촉진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정부가 대대적인 인프라 투자를 하는 편이 낫다.

- 불황기나 인플레 국면에서는 가계와 기업이 모두 한 방향으로만 달려가기 때문에 정부가 정반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 주십사하고 간청하고 싶다. 

- 누군가 하루저녁 내내 돈을 불사른다고 해도, 이 세상 전체의 부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돈 1달러가 재로 변하면 통화공급이 아주 조금 줄어들고, 경제 전체로 보면 물가도 감지할 수 없을 만큼이긴 하지만 분명히 하락한다. 이 사건으로 이득을 보는 것은 돈이 불타는 그 순간에 현찰을 보유하고 잇는 사람들이다. 1달러 지폐 한장을 불태움으로써 발생한 물가하락 덕분에 재산 가치가 늘어난 현찰 보유자의 이익을 모두 합치면 1달러를 불태운 사람의손실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랜스버그, 안락의자의 경제학자 중>

- 만약 누군가 1달러 지폐를 만들어 유통시켰는데, 그 지폐가 진짜 돈과 너무나도 똑같아서 아무도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눈치챌 수 없다면? 물론 사회 전체의 부는 증가하지 않는다. 통화량이 늘어나서 물가가 '감지할 수 없을 만큼이지만 분명히'  오르게 되면, 현찰을 가진 모든 사람이 조금씩 손해를 본다. 그 손해를 다 합치면 정확히 화폐위조범이 얻은 이익과 일치할 것이다. 화폐위조범은 현찰을 가진 모든 사람의 재산을 조금씩 훔치지만 사회 전체의 부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느다. ...................가장 완벽한 '화폐위조범'은 각국의 중앙은행이며, 그들이 화폐를 찍을 때마다 현찰을 가진 사람들은 손해를 본다. 

- 경제정책론의 영역에서 널리 통하는 상식에 따르면, 소수의 이익은 조직하기 쉬우나 다수의 이익은 조직하기 어렵다. 생산자의 이익은 조직하기 쉽지만 소비자의 이익은 조직하기 어렵다. 그리고 수출업자의 이익은 조직하기 쉬우나 수입업자의 이익은 조직하기 어렵다. 우리 언론의 환율보도를 보면 이 세가지 상식이 그대로 들어맞는다.

- 경제활동의 목적은 생산이 아니라 소비다. 생산은 어디까지나 소비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것은 저축이 '현재 소비의 포기' 이며, '미래의 소비' 를 위한 수단인 것과 마찬가지다.

- 소비가 생산의 목적이라면 수출의 목적은 수입이다. 수입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직접 생산하지도 않은 것을 소비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수입은 선이다. 반면 수출은 우리가 직접 만든 물건을 소비하지 않고 외국 사람에게 내주는 행위다. 수출 그 자체는 악이다. 수출이 선이 되는 것은 수출을 해야 수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출업자가 수입에 필요한 외화를 벌어옴으로써 '애국'을 한다면, 수입업자 역시 좋은 물건을 싼값에 사다가 소비자에게 공급함으로써 '애국'을 한다.

- 몇 %를 저축해야 과소비가 안 되는지를 '객관적으로'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국산품을 사든 외제품을 사든 소득에서 소비가 차지하는 몫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국산품 애용주의'는 한국의 기업이 손쉽게 소비자를 등쳐먹는 데 퍽 쓸모가 있는 이데올로기다. 수출 애국주의는 외환위기로 인한 환율 상승의 최대 피해자인 소비자들을 찍소리 못하게 만드는 수출업자들의 이데올로기적 무기다. .....이렇게 해서 다수의 이익은 무시당하고 소수의 이익은 효과적으로 조직되는 것이다.

- 공익의 극대화를 추구해야 할 정부가 이처럼 '잘 조직된 소수집단'의 작전에 놀아나서는 곤란하다.

- 정부가 올바른 태도를 국건히 견지하도록 도우려면, '조직되지 않은 절대 다수'인 소비자들이 수출업자의 이익을 경제이론으로 포장하는 일부 경제전문가들의 주장을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합법적 도박의 자유는 보장해야한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히 해야 할 것이 있다. 노름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노름꾼 스스로 처리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윤의 사유화와 손실의 사회화'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정부는 주식시장의 거품이 꺼지는 경우에도 절대 인위적인 증시 부양책을 쓰지 않을 것임을 미리 분명하게 선언해야 한다. ........자신의 노름빚(투자손실)을 정부가 책임지라며 항의시위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 '슬픔과 노여움의 1980년대'가 '정치적 냉소와 무관심의 1990년대'에 자리를 내준 이후, 젊은이들의 가슴속에는 이상을 향한 열정이 사라지고 대중적 스타와 세속적 성공에 대한 동경과 열망이 들어찬 것으로 보인다.  "잠자는 시간만 빼고 하루 종일 주식만 연구했다"는 이 야심만만한 청년의 포부를 나무랄 생각은 없지만, 주식시장과 펀드매니저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성찰도 함께 해줄 것을 권하고 싶다. 

- 모든 세대는 저마다의 운명이 있다. 그리고 같은 바람을 맞아도 사물이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듯, 같은 시대적 환경에서도 개인적 삶의 양상과 색채가 똑같을 수는 없다. 

- 오늘의 20대가 저마다 무지개처럼 다채로운 색깔의 삶을 개척해나감으로써 이 '21세기형 노름꾼'들의 좌절이 세대 전체의 운명을 어두운 단색으로 물들이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 경쟁을 외적 강제로 느끼는 생산자들이 그 압력에서 탈출하려는 욕망을 가지게 되며, 그래서 그냥 내버려두면 그들이 경쟁시장을 파괴해 버린다는 것도 인정할 것이다. 

- 정부가 신문사의 인사나 보도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정치적 부작용만 크고 효과는 없는 정책이다.  

- 문제는 노동운동을 '공공의 안녕과 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는 파쇼적 사고방식이다. .....국정원과 검찰 공안부 등 '합법적 폭력'을 행사하는 공안기관의 간부들이 기획예산처와 재경부, 노동부와 경찰청 간부들을 모아놓고 노동조합을 와해시키는 데 골몰하는 사회에서 '신노사관계'는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

- 시장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은 이런 식으로 조직된 중앙집권적, 과점적 의사결정 구조를 분권적 구조로 바꾸는 작업이다. .......상호지급보증 등을 통한 재벌의 금융자원 독점과 부당내부거래로 인한 경쟁 제한과 불공정 경쟁을 타파하고, 결합재무제표 의무화와 소액주주권 보호 등을 통해서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고,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촉진하려는 것도 모두 시장경제의 기본 원리인 경제권력의 분권화를 이루려는 것이 아닌가?

-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는 둘 다 분권적, 다원주의적 시스템이다. 경제권력의 집중과 정치적 민주주의는 조화될 수 없다.

-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정의에 따른면 재벌은 "복수의 시장에서 독과점 기업을 포함한 다수의 외형상 독립적인 기업을 총수와 그 가족이 배타적으로 소유, 통제하는 기업집단" 이다. 편법상속과 부당 내부거래 근절, 부채비율 감축, 책임경영과 무능한 총수 퇴진, 소액주주권 강화, 재벌의 금융기관 지배 억제 등의 개혁정책을 실질적으로 집행한다면 기존의 재벌체제가 그대로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하다.

- 용어를 가지고 다투는 것은 의미가 없다. 문제는 수단의 적법성과 실질적인 결과다.

- 투자는 이자율에, 그리고 소비는 소득 수준에 좌우된다고 본 것이다. ......기업의 투자결정은 이자율과 예상수익률, 현재의 경기상황, 그리고 미래의 경기에 대한 예측 등에 영향을 받으며, 가계의 소비지출은 현재의 소득과 자산의 크기, 미래소득에 대한 예측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 한시적 조치는 문제가 될 수 없다. 하지만 무작정 풀어버린 규제를 다시 도입하기는 어렵다. 이렇게 보면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취한 부동산 규제 해제가 현 정부의 집권 후반기에 원성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 상암동 월드컵축구 전용구장 건설 논란과 아파트 분양 과열 현상은 정책 당국자들의 무지나 착각이 문제를 더 악화시킬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무작정 대중의 정서에 영합하는 '허리띠 조이기' 논리나 시장마능 이데올로기에 휩쓸린 무분별한 규제 완화로는 위기를 탈출할 수 없다.

- 경쟁은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삼성자동차가 치열한 국제경쟁을 견디지 못하리라고 누가 감히 예단할 수 있겠는가.

  정부의 임무는 국제 자동차시장의 판도와 전망을 분석해서 삼성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삼성그룹의 총수가 자동차 회사를 만들면서 계열기업 주주들의 이익을 부당한 방법으로 침해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부당 내부거래나 불공정거래를 통해서 경쟁질서를 어지럽히지 못하도록 법규를 엄정하게 적용하고 처리하는 데 있다.................정부는 다만 그 과정에서 다른 이해관계자가 부당한 피해를 입거나 금융질서를 어지럽히는 불공정행위가 나타나지 못하도록 하고 이 회장이 실질적인 의사 결정권자로서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도록 하면 그걸로 그만이다. 

-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려면 지역주민과 기업, 지방자치단체, 정부가 모두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야 한다. 그러러면 우전 '김대중 독재자의 정치보복'이나 '부산 죽이기' 따위의 근거 없는 감정적 선동을 하거나 선동에 휘말리기에 앞서, 스스로 내렸던 선택에 대한 일말의 책임의식부터 표명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싶다. 

 

정치에도 자유경쟁을

3김 정치의 종말은누가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온다. 새로운 정치를 지향하는 이들이 걱정해야 할 일은 그 다음이다. 3김이 만든 선거연합이 그들의 퇴장과 더불어 허물어질 때 그 자리에 무엇을 어떻게 세울 것이며, 그걸 위해서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 낮은 투표율도 민의의 표현이라는 면에서 높은 투표율과 마찬가지로 존중받아야 한다.

- '권력의 생물학적 균형'이 깨진 것은 대통령이 나이가 많아서가 아니다. 정치제도와 풍토가 젋은 세대의 진출을 가로막고 있는 탓이다. 현역 정치인들만의 책임은 아니겠으나, 우리 나라 유권자들은 '좋은 정치'라는 공공재의 공급자인 국회의원을 뽑을 때 사적인 기준을 적요하는 습관이 있다. 지연, 혈연, 학연을 찾고, 평소 상가나 결혼식에 얼마나 열심히 얼굴을 내밀었는지를 따지며, 심지어는 공중목욕탕에서 등을 밀어준 '계획된 인연'에까지도 점수를 준다.
자기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해서 남의 눈치 보지 않고도 잘 사는 젊은이가 이런 분위기에서 선뜻 정치에 발을 들여놓기란 쉽지 않다.

- 지나치게 노령화된 정치권력의 '생물학적 불균형'을 바로잡을 필요성을 인정한다면 386 세대의 정계 진출은 바람직한 현상이라 하겠다. 문제는 그들을 둘러싼 정치적 거품이다. 기존 여야 정당들은 모두 뚜렷한 강령없이 특정 지역을 본거지로 삼아 생존을 지키고 민주적인 토론보다는 총재 개인의 지도력에 의존하는 '지역 선거연합'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정당들이 앞다투어 젊은 정치 지망생에게 손을 내민 것은 2000년 총선에서 젋은 유권자들의 관심을 잡아끌기위한 장식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 TK정서의 밑바닥에는 '때린 놈 콤플렉스'가 깔려 있다. 특히 독재정권에 빌붙어 출세를 했거나, 뇌물과 특혜를 주고받았거나, 패거리를 지어 남에게 못할 짓을 한 'TK 성골' 과 '진골' 일 수록 이런 콤플렉스가 심하다. 개인적으로 나쁜 짓을 한 적이 없는 대다수의 대구 경북 유권자들도 지역사회에서 이런 사람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기 때문에 이 콤플렉스에 감염되었다. 

- 대구 사람들은 목소리가 크고 성격이 급하며 충동적이고 고집이 세다. "말 많으면 공산당" 이라는 극우적 교시가 잘 먹히는 것도 이런 성격 때문이다. 또 비뚤어진 경우가 많지만 적어도 주관적으로는 의협심이 강하다.

- 문제는 김대중이 아니라 꼬치꼬치 시시비비를 가리는 사람한테는 승복하기 싫어하는 자신들의 기질에 있다는 것도 알 만큼은 안다.

- 문제는 오히려 사람들이 지레 겁을 먹고 정면 승부를 피한다는 데 있다. 예컨대 맨날 술 먹고 동네를 어슬렁 거리면서 광주에는 실업자가 없다는데, 하는 따위의 흰소리를 늘어놓는 자가 았으면 이렇게 면박을 줘야 하낟. "그라모 퍼뜩 광주 가서 취직하지, 니 와 그리 놀고 있노, 임마!" 이렇게 해야 알아먹지, 그렇게 말하는 근거가 뭐냐고 논리적으로 따져봐야 말짱 헛수고다.

- 부자는 '이대로!'를 외치고 가난한 이들은 길거리에 나앉는 이 삭막한 분열의 시대에..

- 사죄를 하지 않는 건 인간성이 막돼먹어서가 아니라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그는 그 자신과 똘마니들의 위기를 국가의 위기와 구별할 줄 몰랐고 자신의 똘마니들의 부귀영화를 국리민복과 구별할 줄도 모른다.

- 5.18은 우리 세대와 DJ의 '관계'를 크게 바꿔 놓았다. 전국 주요대학의 학생회 간부들의 휴교령이 내릴 경우 일제히 가두투쟁을 벌이기로 약속해놓고서도 광주 한 곳 말고는 그 약속을 지킨 곳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과 부산에서 시위가 일어났으면 광주가 그렇게까지 참혹한 보복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자책감이 1980년대 내내 우리를 짓눌렀다. 그리고 '광주만의 희생'에 대한 이 집단적 채무의식은 그 지역민의 한과 슬픔을 상징하는 정치인 김대중과의 역사적 연대의식으로 발저했고, 이것이 1987년 대선에서 학생운동권과 재야의 'DJ 비판적 지지'라는 정치적 연대로 표출되었다.

- 나는 무엇이 되느냐가 아니나 어떻게 사느냐를 중시한다.            <김대중>

- 절대권력은 반드시 썩는다.

- 남의 허물이 나의 알리바이는 아니다. 

- 이러한 '닮아가기 경쟁'에서 대한민국은 북한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어느것 하나 북한만큼 철저히 실행하지 못했고 또 성공하지도 못했다. 만약 대한민국이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승리했다는 '냉전적 표현'을 받아 들인다면 그 승리의 비결은 이 '닮아가기 경쟁'에서 패한 데 있다. 우리는 북한과 철저하게 달라져야 한다. 
 
- 우리 국민의 머릿속에는 체제경쟁이 '닮악가기 경쟁'이라는 사고방식이 뿌리 깊게 남아 있다. 북한 형법의 폐지를 국가 보안법 폐지의 전제조건으로 삼고, '국군포로' 송환을 '비전향 장기수 북송'의 조건으로 삼고, 북한 사뢰를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주체사상의 존재를 우리 사회에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알리바이로 삼는 논리는 바로 이러한 도착된 냉전적 사고방식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상대방의 잘못을 이유로 들어 자신의 똑같은 잘못을 정당화시키는 냉전적 사고틀에 갇혀 살았다.



낡은 권위와의 결별

사회 정의를 위해서는 전문성에 대한 근거 없는 미신을 뒤집어야 한다. 집단적 사익을 공익보다 앞세우는 '전문가' 보다는 공익을 추구하는 자세를 가진 '문외한' 장관과 국회의원이 나는 좋다.

- 무어소다도 위험한 것은 '결국 돈이구나'의 가치체계,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인간관, 시장논리와 부가가치론으로 사회를 운영하려 드는 초급 경영론적 멘털리티이다.

-  슬픈 일이다. 비판 논리를 끝까지 따라가보면 '아무도 더 행복해질 수 없고 누구도 더 불행하게 만들지 않는, 그러나 대다수가 불만을 가진 현재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 말고는 성난 교수님들의 마음을 풀어드릴 길이 없다.

- 물론 교육부 안은 최선이 아니다. 하지만 사업의 백지화는 국가적으로 볼 때 차선 또는 차악마저 배제하는 최악의 선택이다. 이 승리를 원하는 분들은 이렇게 자문해보셔야 할 것이다. "내가 속한 학문분야, 내가 몸담은 대학이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주로 대학원생을 양성하는 데 쓸 1조 4천억원의 인력양성비는 없어지는 편이 더 좋은가?"

- 대학의 특성화는 다양한 정책을 통해서 이루어나가야 할 장기적 과제이지만, 이런 식의 역할 분담에 국 공립 대학교수들은 아마 목을 내놓고 저항할 것이니 우리는 앞으로 오랜 기간 이 문제를 놓고 사회적 합의를 모으기 위한 토론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장기적 비전'을 1999년도 예산 2000억 원을 할당하는 기준으로 삼는 건 불가능하다.
교수대표체가 "교육부 안보다 100배는 민주적이고 효율적인 대안을 만들어 제시할 자신이 있다"는 것도안다. 하지만 이것을 실행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손 교수도 너무나 잘 아실 게다. ........ 안된 말씀이나 우리 대학교수들은 한 대학 안에서도 이해관계의 갈등을 조정하고 절충하지 못한다.

- 교육부는 방학책을 사실상 강매하여 번 돈으로 조직을 운여하는 교총의 불법행위를 오랫동안 눈감아 주었으며, 교총은 전교조 교사들을 학교에서 내쫓는 데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등 언제나 찰떡궁합을 과시해왔다. 교통은 교원단체이지만 교육 그 자체보다는 교원의급여와 지위 향상 등 사실상 노동조합이 해야 자연스러울 일만을 했을 뿐이다........투옥과 해직의 고통을 마다 않고 싸웠던 전교조가 애초 내세운 깃발은 '참교육', 다시 말해 교육개혁이었다. 이름은 노조면서 사실은 교원단체가 할 일을 떠맡고 나선 것이다.

- 노령교사들의 퇴임으로 절약한 예산을 가지고 수만 명의 젊은이를 채용하고 교육환경을 개선한다는 이른바 '경제논리'가 정년 단축의 요체는 아니다. 권위주의적이고 불투명한 학교 운영으로 교육현장을 질식시키는 학교 운영자와 모든 종류의 개혁에 저항하고 원래의 취지를 왜곡시키는 교육관료들을 물갈이하지 않고서는 어떤 교육개혁도 성공할 수 없다.

- 사실 정년 단축으로 물러나는 교사들은 대부분 교장과 교감 등 학교 운영자와 노령 교육관료들이다. 그들은 권위주의적 학교문화를 만든 책임자들이다....학교현장에서 다양성과 개성을 존중하는 민주적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다. "노련한 교사들을 학교 밖으로 몰아낸 교육 문외한 이해찬"을 비난한 젊은 교사들은 도대체 그 동안 교사들의 자주성과 권위를 억압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 대한민국의 어떤 사용자가 직원을 채용하면서 그 대가로 돈을 받는가? 사립 중 고등학교와 사립대학 재단 이사장들밖에 없다. 그것도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학교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말이다. .......거기에 한사코 반대하는 것은 학교 운영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 교직을 다양한 전문직종 가운데 하나로 간주할 경우, 차등적 보수를 비롯한 경쟁원리의 도입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선생님의 일은 아이들의 지적 성장을 돕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먼저 그에 필요한 전문적 능력을 키워야한다. 촌지나 체벌은 교육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전문직의 직업윤리에도 맞지 않는다.

- 아이들은 저마다 개성을 존중받으면서 정신적, 지적으로 성장하는 바로 그만큼 인격이 형성되기 때문에 별도의 '전인교육' 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성장하는데 필요한 지식과 경험을 얻는 여러 원천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선생님들에게 무한 책임을 지우고 아이들에게 무조건적 복종을 요구하는 '군사부일체'의 낡은 관념은 이제 벗어 던질 때가 되었다.

- 관점의 선택은 개인의 경험과 철학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 학교는 사회와 가정이 망가뜨려 놓은 아이들을 고쳐주는 애프터서비스 센터가 아니다. 선생님들이 그런 짐을 기꺼이 맡아준다면 고마운 일이겠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학교와 선생님이 아이들을 망가뜨리는 일이 없도록 반성하고 경계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 놀랍게도 "학생은 모든 형태의 신체적, 정신적, 성적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는 선언적 체벌금지 조항에 대해서 교사들이 모두 반대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나와 있었다.

- 이 문제를 공론화하는 그 자체를 '교원 죽이기'라고 비난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 나는 '교직은 성직 또는 천직'이라는 황당한 이데올로기를 거부한다. 개인의 직업 선택의 자유에 간섭하는 하느님은 어디에도 없다....아이들의 정신적 성장을 돌보는 직업이라는 자부심이야 아무리 존중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회가 교사를 특별하게 대접해야 할 이유는 없다.

-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교사의 권위를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교육전문가로서 지적 능력이며 아이들과 학부모는 우선 잘 가르치는 교사를 원한다. ....교사로서의 전문적 능력이 뛰어나면 권위는 저절로 선다.

- 아이에게 매 맞는 두려움을 주는 학교,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는 교사에게는 절대로 아이를 맡기지 않겠다. 

- 컴퓨터를 잘 다루고 인터넷을 자유자재로 드나드는 아이들을 보면서 흐뭇해하는 어른들이 많다. 착각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시대에도 핵심적인 것은 정보를 수집하고 판단하고 처리하는 능력과 그 정보를 활용해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다. 
  당면한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창의적인 방법을 찾아내고,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과 협력하고, 연대하고, 행동을 조직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많이 길러내는 사회만이 발전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 전문성은 필요하지만 전문성만 있다고 만사형통인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 사회정의를 위해서는 전문성에 대한 근거없는 미신을 뒤집어야 한다. 대학교수를 절대로 교육부장관으로 임명하지 말고, 법조 경력이 없는 법률전문가를 법무부 장관으로 발탁하고, 민간인을 국방부 장관으로 세우고, 건설업계에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이에게 건설교통부를 맡기자. 그러면 나라꼴이 지금보다는 훨씬 좋아질 것이다. 
  집단적 사익을 공익보다 앞세우는 '전문가'보다는 공익을 추구하는 자세를 가진 '문외한' 장관과 국회의원이 나는 좋다.

- '부패부등식(뇌물의 액수 > 적발되어 처벌받을 확률 * 처벌에 따른 손실액수)'의 좌변을 줄이기 위해서는 별다른 효과없이 공무원들의 배만 불려주는 쓸데없는 규제를 과감하게 줄여야 한다. 부등식의 우변을 줄이기 위해서는 시민단체의 주장처럼 조직 내부의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사람을 철저히 보호하는 법률을 만들어 부정이 적발될 확률을 높여야 하고, 적발된 비리에는 가차없는 처벌을 내려야 한다. 비용을 들이지 않고 우변을 키우는 방법은 '일벌백계'로 처벌에 따른 손실액을 대폭 높이는 것이다. 작은 부정에 대해서도 파면 등 중징계를 하고, 돈을 준 사람도 똑같이 처벌하고, 뇌물로 모은 재산을 한푼 남김 없이 몰수하는 법률을 만들어야 한다.

- 그러나 어쩌랴, 이런 법률을 만들어야 할 국회의원들이 이런 강력한 부패방지법을 원하지 않을 터이니 말이다.

- 변화와 변절은 다른 것이다. 맛이 가더라도 썩어 변질된 맛과 잘 익어 승화된 맛은 전혀 다르다. 내가 변하지 않았다고 보는 눈과 내 변화를 부정적으로 보는 눈. 이들은 사람과 세상을 진화, 발전하는 과정으로 보지 않고 완결된 고정체로만 본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 자기 관점 이외에는 모두 틀렸다고 보는 절대 유일의 잣대만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서로 통한다.          <박노해, 오늘은 다르게>

- 나는 박노해가 가졌던 사상에 반대한다는 것을 분면하게 밝히면서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글을 여러차례 썼다.
'나의 자유는 언제나 나와 다른 생각이 다른 사람의 자유를 의미한다.'는 진짜 자유주의자의 신조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 하지만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시민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행동은, 자기가 반대하는 사상과 견해를 가진 이가 그것을 표현했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을 때 거기에 대항해서 함께 투쟁하는 것이다.

- 표현의 자유를 전제로 한 '사상의 자유시장'없이는 '그릇된 사상의 도태와 새로운 진리의 발견'이 이루어 질 수 없다. 역사적으로 입증된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경쟁력'은 그것이 '사상의 자유시장'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충고는 매워야 제 구실을 한다는 생각 때문에 쫀쫀하다는 비난을 받는 한이 있어도 어쩔 수 없다. 지나간 한 시대의 상징적인 인물이 거품과 허세 때문에 스스로를 우습게 만드는 길로 빠져드는 것을 수수방관하는 것보다는 충고를 하느라고 욕을 먹는 쪽이 더 낫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박노해 시인이 과장된 감수성과 빛나는 어휘, 힘창 문장만으로는 남에게 '희망을 찾아주는' 감동적인 산문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란다.

- 우리는 조선시대 이래 새로운 사상적 조류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박해하는 전통을 가진 나라에서 살고 있으며 이런 전통은 국가보안법에 의해 면면히 계승되어왔다. '남녀상열지사'에 대한 탄압 역시 조선시대 이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이 전통 역시 '음란물'과 '미풍양속 훼손'을 단속하는 형법으로 계승되어왔다.

- '판매심의'의 주역이라는 교보문과 영업부 과장의 말이 재미있다. "랩을 씌워서 판매할지 여부는 출판사가 최종 결정하는 겁니다. 물론 책을 매장에서 팔고 안 팔고는 우리가 결정합니다." 인터뷰 기사는 교보문고를 상도덕에 투철한 건전기업으로 미화하고 있으나, 여기에는 무서운 진실이 숨어있다. 유통조직을 통해서 얼마든지 책의 흐름을 차단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서점이용자의 산 사람으로서 이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교보문고에서 책을 사고 안 사고는 독자가 결정합니다.
                  <월간 인물과 사람 , 최성일>

- 무슨 의도로 책을 썼는지가 도대체 왜 중요한가?............잘 나가는 전문의한테 인명을 구하려는 숭고한 사명감이 아니라 돈을 벌 목적으로 의사가 된 것이라고 비난한다면? 변호사더러 사회정의와 인권 실현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사법고시를 보지 않았느냐고 다그친다면? 동네 쌀집 아저씨더러 주민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벌 목적으로 쌀집을 열었다고 욕한다면? 기업인더러 고용 창출이 아니라 돈벌이를 위해 창업한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런 소리를 하다가는 아마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 대한민국에는 두 종류의 국민이 잇는가 보다. 하나는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는 미숙하고 우둔한 국민이요, 다른 하나는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것을 대신 판단해주는 검열자들이다.
   우리는 정말 '민주공화국'에 살고 있는가?

- 문제는 형평성이요 역지사지다........그렇지만 여성의 경우 특별한 배려를 해주어야 한다. 남성들은 자신들이 주도하는 사회적 질서와 도덕규범에 익숙하지만 여성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남자들이 오히려 더 엄격한 잣대를 자의적으로 휘둘러 '잘난 여자'들의 '옆구리'를 걷어차고 일부 '배웠다는 여자들'까지 여기에 가담하는 작금의 사태는 대한민국이 '야만문화의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음을 증명한다.

- 지성의 산실이라는 대학마저도 법률의 강제가 있어야만 마지못해 불합리한 제도를 고치는 참혹한 세상을 사는 것이 슬프다.


에필로그 
          다시 슬픔과 노여움으로

-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네크라소프>

- 나는 힘센 남자는 아니지만 일을 제법 많이 그리고 열심히 하는 편이다. 나이 마흔이 넘은 지금 나는 그 힘이 어디서 왔으며, 앞으로는 어디에서 인생의 에너지를 얻을 것인지 자문해본다. 어느정도 자의식이 형성된 스무 살 이후만을 본다면 내 삶의 에너지는 슬픔과 노여움, 그리고 부끄러움에서 나왔다.

- 슬픔과 노여움이 힘이 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부끄러움을 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갓 대학에 입학햇던 1978년 여름, 나는 구로공단 봉제공장의 내 또래 여성노동자들이 매주 60시간 넘게 일해서 받는 한달치 월급이 대학촌의 한 달 하숙비보다 적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 뒤로는 밥을 남긴다든가 여자대학 학생들과 그 당시 잘 나가던 <우산속>이라는 곳에서 단체 고고미팅을 한다든가, 첫시간 강의에 지각을 하는 그 모든 평범한 일에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어버렸다. 선배들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재판을 받는 걸 본 뒤로는 사법고시를 보려고 생각했다는 사실 그 자체도 부끄러워졌다.

- 프리랜서 또는 시사평론가라는, 자격증도 필요 없고 등단 절차도 없어서 누구나 마음대로 '참칭'할 수 있는 편리한 직업을 가진 지금, 나는 어떤 조직에도 속해 있지 않으며 어떤 운동에도 참가하지 않고 산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의 전부다. 20여 의 고민과 방황과 시행착오 끝에 찾은 이 직업 아닌 직업은 몸에 잘 맞는 옷처럼 편안하다.

- 통계청이나 국세텅에서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내 직업은 '지식 소매상'이다. 지식 소매업은 유통업의 일종이다 . 일찍이 묵가는 생산하지 않는 자는 먹을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건 백 번 지당한 말씀이다. 하지만 생산은 하지 않고 말만 많은 유가를 이 논리로 공박한 것은 온당치 않은 처사였다. 사회적 분업이 높이 발달하면 직접 땅을 갈거나 기계를 만지지 않고도 생산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는 지식과 기술이다. 사회에 필요한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는 사람은 최소한 남들만큼 또는 남들보다 더 잘 살 자격이 있다. .....누군가가 창조한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널리 퍼뜨려 많은 사람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지식 유통업자'도 마찬가지로 먹고 살 권리가 있다. 아무리 귀중한 지식이라도 몇몇 '전문가'들끼리만 알고 지낸다면 세상에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 나는 독자들에게 친절하고 서비스 좋은 '지식 소매상'이 되고 싶다. 남에게 신세지지 않고 한평생 살 수 있다면 끝까지 그렇게 살다 가고 싶다.

- 프리랜서의 비애는 먹고 살기가 힘들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프리랜서를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자기 검열'이다..........언론이라는 지식 유통업계에서 '왕따'를 당하지 않으려면 원고를 청탁한 신문사와 잡지사 기자들을 너무 난처하게 만드는 일을 되도록 삼가야 한다......문제가 너무 자주 생기면 밥줄이 끊어질 수 있다. 프리랜서의 자기 검열이 시작되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다.
posted by Dr.Hannah Son
:
독서 2010. 6. 15. 19:23



나는 아직 전공이 없다. 즉 일반의 이다.
일반의로도 진료를 볼 수 있지만, 아직 이라고 썼듯이 난 전문의가 되고 싶다.
정신과는 내가 5년전부터 전공하고 싶었던 분야이고 두해동안 세번 시험을 봐서 세번 다 떨어진 전공이다.
올 연말에도 또 시험을 볼 생각이다.
몇 개의 법안과 트랜드가 합세하여 근래 정신과는 최고의 인기과가 되었다.
내리 두해를 떨어지고 나니 올해도 정신과라는 말은 감히 못하겠다.
로컬에서의 시간은...
이곳이 아니라면 몰랐었을 일들, 못만났을 사람들, 배우지 못했을 내면의 성장을 주긴 했지만..
숨막히게 꽉짜여 돌아가는 종합병원에서의 시간이 이제는 그립다.
그리고 머리가 터질 것 같이 밀려들어오는 새로운 지식에 쫓기고 치여 어느새 돌아보면 훌쩍 자란 내모습을 볼수 있는 그런 경험을 다시하고 싶다는 생각도 크다.(레지던트인 친구들이 보면 배부른 소리라고 하겠지만 후후..)

그저 그런 내신, 그저 그런 인턴 점수..
조금은 고지식하게 생긴 외모와 박력이 떨어지는 말발..
외과계열과 비임상파트를 제외하고 나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과의 개수는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그리고..참 바보같게도..
난 아직 정신과가 제일 많이 하고 싶다.

골칫거리들의 집합소라는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내겐 그리움이고 안쓰러움이다.
무작정하고 감상적이 되는 것은 의사로서는 오히려 위험스런 일이지만,
측은함이 없이는 환자의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한다.

내게 당신의 얘기를 해주세요 라고 거침없이 말 해놓고도 서로가 머쓱해 하지 않을 공간을 꿈꾸기에 아직도 나의 정신과에 대한 바램은 진행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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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종종 순수한 과학의 승리라고 묘사되는 사건에 사실상 문화와 상업성이 어떻게 침투해 들어갔는지를 묘사하는 사회적 역사를 쓰려고 한다.

- 어떤 행동이 "미친" 것인지 명기할 능력이 없다는 점에서 정신의학은 분명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행동의 기준을 규정하는 규칙 제조 분야이다. 그러나 정신병의 경우는 어떠할까? 정신병은 젠더, 계급 등과는 무관한 엄연한 현실이며, 과학적 방식으로 체계적으로 설명되고 치료되고 그 지형이 그려진다.


Chapter 1  정신의학의 탄생
  
정신과가 없던 시절, 광인들은 집에 묶여 있거나 길거리를 배회하거나, 혹은 호스피스 등에 치매, 걸인, 부랑자들과 뒤섞여 감금되었다. 19세기 비로소 정신병자 수용소가 탄생하면서 정신의학은 비로소 독립된 전문분과로서 첫발은 뗀다. 계몽주의 희망의 물결을 타고 치료적 수용소의 꿈이 시작된 것이다.


- 의사들은 용기와 힘을 가져야한다. 모든 사람이 의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의사란 어떤 특성을 가지도록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고, 그 특성이란 인간성의 파괴를 온몸으로 막아 내는 것이다. 원칙이 훼손되는 것을 보면 의사들은 행동으로 이를 가로막아야 한다.                      <레일, 1803>

- 상냥함과 지극한 솔직함만이 환자의 내밀한 생각에 다가갈 수 잇고 불안을 잠재울 수 있으며, 환자가 자신의 문제를 남과 비교하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갈등을 다룰 수 있다     <피넬 1801>

- 해스럼은, 환자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다만  "온화한 태도와 표현, 환자의 말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그리고 환자의 말을 믿어 주는 듯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의사-환자 관계에서 바람직안 의사의 자질을 이만큼 간단명료하게 표현한 말은 없을 것이다.

- 정신의학은 탄생 시초부터 신경과학이라는 한쪽 날개와, 정신사회적 관점이라는 다른쪽 날개로 비상을 시작했다.


Chapter 2  수용소의 시대

19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치료적 수용소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구속과 사슬이 없어지고 광란의 울부짖음도 사라지는 그 즈음 수용소는 몰락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초만원으로 변하는 수용소에서, 의사들은 밀려오는 환자들에 짓눌린다.

- 수용소의 창궐은 선의에서 출발한 것이 어떻게 참담한 결과로 끝나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  쾌적한 장소, 직원들 마음속에 있는 진보적이고도 신뢰할 만한 정신, 의사들의 열의, 치료설비의 풍부함, 제반 분위기..이 모든 것들이 샤렝통 환자들의 치료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프랑스에서 의미하던 '치료할 수 있음'이라는 말은 오직 샤렝통에서만 가능했다는 말이 되겠다. 진보 정신이 더 이상 퍼져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략..........관료조직의 무기력함과 정치적 저항은 에스퀴롤의 이념이 86개 현으로 전달되는 것을 차단했다. 

- " 요양원에서도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는 욕구는 처벌에 대한 공포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작동한다. 이 원리는...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심지어 광인의 행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자신의 "병적속성"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면 "마음이 강해지고 자기억제라는 건강한 습관을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경험에 의하면, 광기를 치유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도덕적 수단이다."       <새뮤얼 튜크> 

- 급성 환자와는 증상을 두고 언쟁하지 말 것이며, 친근하고 달래는 목소리로 고통을 안정시켜 주면 때로
빨리 회복되는 수가 있다.          <버로우스의 도덕치료 지침 중>

- 정신질환 중 어떤 것은 시대의 변화와 상관없이 일정한 수를 유지했고, 어떤 병은 그렇지 않다. 이들 사이의 차이를 구별하지 않고 광인이니, 정신이상이니 심란한 자이니 말하는 것은 광인이라고 붙여 놓은 라벨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그 라벨을 벗겨 보려는 노력을 애초부터 포기한 것과 다를바 없다.

- " 정신의학은 의학의 의붓자식일세."
왜냐하면 정신의학은 아무것도 평가하지 못하고 측정하지도 못해서 자연과학으로 분류되지도 않는다고 했다.  
" 그리고 사람들은 정신과 의사가 무언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도 않는다네. 그저 사람마다 다소간은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략.............정신의학을 하면 자네는 수용소에 고립되어 점점 희미한 존재가 될고 말 걸세. 정신과 의사는 치료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치료해야 하고 그래서 매일같이 이런 모욕을 꿀꺽 삼켜야만 한다네.."                             <카를 융이 제자에게>


Chapter 3  생물학적 정신의학의 탄생

19세기 과학혁명의 물결은 틀이 잡혀 가던 정신의학에도 흘러 들어왔다. 1세대 생물정신의학자들은 정신질환이 운명이 아니라 뇌의 질환이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 했다. 그러나 빈약한 근거와 퇴행이론 등은 자가 당착에 빠지고 정치적으로 악용된다. 그 뒤를 이어 크레펠린의 기술 정신의학 시대가 시작된다.

- 마이어가 도착해서 본 캔커키의 "병원 의사들은 반복되는 일상에 절어 절망적으로 침체되어 있으면서도 그 생활에 완벽하게 만족하고 사는 곳"이었다.
 
- 19세기 마지막 4분기 동안 정신의학의 학문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단지 토론의 대상이던 퇴행이론이 거리로 나와 관심의 초점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떤 사상이든 후유증을 낳을 수 있음을 (그리고 의사들은 대중에게 공표하기 전에 자신들이 믿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신중히 재고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하는 이 과정에서, 대중은 퇴행이론으로 다시 공포에 사로잡히게 된다.

- 나치가 유전론을 악용함으로서 1945년 이후로도 오랫동안 유전에 관한 토론을 금기 사항이 되어왔다. 중류층 지식인들에게는 유전과 퇴행이 동일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 종적 시각이란 어느 한 시점에 나타난 환자의 문제를 환자의 삶의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하고자 했던 것으로, 생전의 신경학적 소견을 뇌 부검 소견으로 해석하려는 생물학적 시각과 대조되낟. 

- 관찰에 의해 사실을 축적하던 크레펠린의 방식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주요 정신질환을 이해하는데에 가장 중대한 통찰을 제공했다. 크레펠린 방식이란, 정신병에는 각기 다른 몇 가지 근본적 유형이 있다는 것, 이들은 서로 다른 질병 경과를 밟는다는 것, 그리고 많은 사례를 모아 체계적으로 연구함으로서 질병이 특성을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 정신 질환의 종말은 어떠할까? 정신질환이 어떻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가?

- 환자의 꿈에서부터 뇌 구조까지 아우르는 통합적 정신의학이라는 원대한 계획을 마음에 품과 있었다. 그럼에도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심리학도, 신경해부학돠 아닌, 환자의 질병이 시간 경과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관찰하는 것이었다. 
   정신질환의 귀추를 지켜보는 것, 이 귀추에 근거해서 질병을 감별하는 것이 크레펠린주의적 대변혁의 본질이었다.

- 증상을 상세히 기술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원인(신경매독, 갑상선 장애 등등), 경과, 최종상태에 대한 근거를 기술하지 않으면 그 기록은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Chapter 4  신경성 질환의 시대

혐오의 대상이 된 정신의학, 하지만 수용소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환자와 대중의 혐오를 피하고 부자 환자를 유치하려는 의사는 '신경성'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낸다. 신경성 환자를 유치하기 위한 온갖 치료법이 난무하던 이 시기 드디어 심리적 치료의 싹이 튼다.

- 오늘날 환자에게 "스트레스" 때문에 병이 생겼다고 말해 주는 것과 같은 종류의, 말하자면 일종의 기만이 당시에 왜 필요했던 것일까? 의사들은 환자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줘야 한다는 중압감을 항상 느껴왔고, 특히 정신과 의사의 경우 치료효과가 좋을 것처럼 낙관적 태도를 취해야 했었기 때문이었다. 1911년에 버나드 쇼가 의사-환자 관계에 대하여 말했던 것은 반드시 정신과 의사를 지칭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 경우 아주 적절하다. 

 병원 안에 있는 직원들 중 그 누구보다도 더 환자를 기쁘게 해주며 살아가야 할 의사는, 진찰하면서 생활비도 벌어야 하고 품위있는 놋쇠 문패도 달아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술 못 마시는 사람에게는 물만 마시라고 처방하고, 알코올중독자에게는 브랜디나 샴페인 젤리를, 스테이크를 비만한 자에게, 혹은 "무요산" 채식성 음식을 정반대로 처방하거나, 늙은 대령에게 창문도 닫고 난로에는 불을 지피고 무거운 코트를 입으라고 권하거나, 유행을 따르는 젊은이에게는 품위를 지키도록 조금만 노출하고 밖에 나가라고 권하면서도, 한번도 감히 "잘 모르겠습니다." 혹은 "제 생각은 다릅니다." 라는 말을 하지 못하는 자신을 곧 발견하게 된다. 

- 의사 -환자 관계에서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환자의 삶에 대해 "친밀하게 아는 것"이 치료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포렐>

- 데제린의 격리치료는 통상적으로는 돈이 많이 드는 미첼 식의 휴식치료를 개인 클리닉이 아닌 곳에서도 할 수 있음을 처음으로 보여 준 시도였다. 이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데제린 치료법의 성공비결은 휴식치료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픈 사람이 말하는 것에 귀 기울였던 그의 진료방식에 있었다. 그는 자신의 히스테리 병동 회진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내가 도입한 정신치료적 방식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주 단순하기 그지없는데, 그저 단호하고도 자애로운 훈계와 함께 논리적으로 환자를 설득하는 것뿐이다. 아침 회진 때면 환자 한사람마다 간밤에 어떠했냐고 묻는다.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이 환자가 생각하는 것만큼 중대한 것이 아니라고 나는 끈질기게 설명한다. 그리고 환자의 대답에 확신이 들어있음을 느낄 때까지 그 환자 옆에 있다가, 다음 환자에겍로 건너갔다. "

- "데제린은 가난하고 초라한 재봉사 혹은 지붕 수리공의 침대맡에 앉아서 이들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 가족간의 다툼, 임금 받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아이가 이가 나려고 보채는 바람에 밤을 샜던 얘기 등등을 주의 깊게 다 들었다. 그는 공감어린 감정적 반응을 환자에게 거리낌 없이 드러내었다. 그는 관대하고 익살맞은 아버지였고 병원은 그가 훈련시킨 간호사들이 있는 포용하는 어머니였다. "                      <젤리프>

- 신경과 의사들은 이제 신경증 환자의 환경 교육정도, 성격, 기질과 사회적 조건의 중요성과 이들이 가진 주관적 느낌을 다루지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략.....대너는 결론짓기를 "신경과 의사는 슈퍼맨이 되어야 한다. 자신이 진료하는 환자보다 더 높은 이상과 더 강한 자제력, 그리고 삶의 지혜와 더 넓은 혜안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 과대 망상적 발언을 해학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이것이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정신과 의사들이 추구하던 바로 그 역할 이기 때문이다.

- 정신치료가 확산되던 그 초기에 정신의학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광기"에 관한 교조적 이론이 환자들을 정신과로부터 멀어지게 했고, 온갖 증상에 다 갖다 붙일 수 있는 만병통치약 같은 "신경성"이라는 용어가 환자로 하여금 신경과 의사와 내과의사에게 달려가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1차 세계대전 즈음 서구 세계 어디에서나 정신의학은 의학의 주류에 들어가지 못하고 변방에 머물러 있었고 인간사의 불행과 슬픔에도 다가가지 못했다.  



Chapter 5  정신분석, 그리고 정신의학의 단절

각종 요법이 성행하던 시기에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을 고안해 내어 부르주아 계층의 자기성찰 욕구를 채워 주게 된다. 프로이트의 추종자들은 정신분석을 치료에 적용하고, 더 나아가 운동의 차원으로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 수세기 동안 정식과 의사들은 이 질병이론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를 정신의학의 소유라고 생각했는데, 그러했던 특별한 이유는, 정신분석이 정신의학의 존재 공간을 수용소에서 개인 진료소로 이동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 환자는 의사로부터 지속적인 돌봄과 친밀함을 기대한다.
   정신분석의 원칙은 이들 환자를 진료하던 가정의, 신경과 의사 등 신체를 진료하던 의사들의 행위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잇다. 그러나 문제는 이 의사들이 사용하던 온갖 위약 치료법들 (예를 들어 수치료법, 전기치료, 식이요법 등)이 환자에게 충분히 돌봄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전달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정신분석은 그 특성상 의사와 환자가 자기 탐색이라는 과정을 통해 의사소통하고, 환자는 자신이 정서적 돌봄을 받고 있다는 암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의사-환자의 만남에 존재하는 정서적 간격을 채워주는 특성을 갖고 있었기에 초기에 그렇듯 큰 인기를 끌었던 것이다. 정신분석은 환자가 배려 받고 있다는 분위기에 젖어들게 하는 의사 환자 관계를 제공했던 것이다. 

- 막판에 정신분석이 승리하게 된 이유는 프로이트 이론이 탄탄했었기 때문이 아니라 개인 의원들이 번성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 중앙유럽 정신의학계에서 정신분석을 도입하려는 시도는 세방향으로부터 일어났다.
첫째, 의사 환자 관계에서 심리적 측면에 더 섬세하게 반응하기 위해서
둘째, 개원가에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끝으로 공공의료 분야에서 정신분석을 도입하려 했던 이유는 치료에 조금이라도 희망을 가지기 위해서 였다. 
신경증의 심리 치료 방식을 흡수할 경우 정신의학의 범위가 얼마나 넓어지게 될 것인자 의사들이 깨닫게 되면서 각기 세 방향으로부터 정신분석이 유입되어 비로소 진료소에 바탕을 둔 정신의학의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 당시 정신의학은 "좋은"환자와 "나쁜" 환자를 구별했다.  좋은 환자는 비교적 젊고, 매우 지적이고, 자기 성찰적인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교육을 받은 중류층 사람을 뜻했다. 나쁜 환자란 중증, 만성적 무능상태로, 정신분열증, 중독, 그리고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환자가 분석치료에 적합한 사람이어야 좋은 환자라는 것이지요. 치료가 환자에게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반 프라그와 같이 사려 깊은 의사에게 정신의학은 의학의 모조품이자 수치거리였던 것이다.



Chapter 6  대안을 찾아

정신분석과 수용소 라는 두 갈림길 사이에서 어느쪽으로도 마음이 끌리지 않았던 정신과 의사들은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신경매독의 열치료법과 수면연장법 등은 약물혁명을 예고했는가 하면, 전기충격요법과 뇌엽절제술은 격렬한 반정신의학 운동을 야기했다. 반면 정신치료의 새로운 비전의 밑바탕이 된 낮병운과 치료공동체가 등장한다.
 
-  20세기 전반, 정신의학은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환자가 저절로 나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거대한 수용소 건물에 환자를 가둬 놓고 있던 한편, 다른 곳에서는 정신분석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부자들의 자기 성찰 욕구에 맞는 것일 뿐 진짜 정신질환에 적합한 것은 아니었다.
 
- 1934년 사켈은 첫 번째 성과를 방송으로 알렸다.  즉 인슐린으로 저혈당을 유도하여 인슐린 혼수에 빠뜨린 결과, 증상이 놀라울 만큼 완화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략................
그러나 사켈의 성과는 대학 클리닉 이외의 곳에서는 웃음거리가 되었고, 사켈은 사기꾼인 데다가 푀츨이 그를 후원한다는 게 미스테리라고 조롱을 했다.............략..........정신분석이 지배하던 미국 정신의학 협회에서는 처음에 그를 회원으로 받아들이길 거부했고, 나중에 <뉴욕타임스>의 과학부 기자가 사켈의 성과에 관심을 촉구하자 겨우 그를 받아들였는데 돌아보면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사켈은 자신이 명예와 선취권을 방어하는 데 온 생애를 보내다가 1957년 사망하였다.

- 정신분석가들은 수용소 정신과 의사들을 가난한 시골뜨기 사촌쯤으로 여겼다. 그러나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이 시골뜨기 사촌들은 환자를 감금하고 관리하는 것에 불과했던 관리보호주의의 막다른 골목에서 탈출하고자, 그리고 의학의 본류에 다가가고자 인슐린 혼수요법을 그러잡았던 것이다.

- 한 은퇴한 정신과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ECT가 없었더라면 나는 정신과 의사를 계속해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경련치료가 없었더라면 대부분의 정신질환이 가지고 있는 처참함과 치유할 수 없다는 절망을 견뎌내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 ECT는 정신분석을 진퇴양난의 궁지로 몰아넣었다. 주요우울증을 가장 효과적으로 치료하는 새로운 방법을 정신분석 이론으로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수련의 입장에서는, 정신치료가로 수련을 받고 많은 환자를 봐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개업 의사가 된던가, 아니면 박복의 정신병원 의사가 되어 ECT를 하던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 영국이 전 세계에 내놓을 만한 것은, 정신질환의 기저에는 인간관계의 폐해가 깔려 있다는 이론이었다. 만일 정신병과 신경증이 잘못된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건강한 인간관계를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 치료가 될 것이다.

- 뇌엽절제술은 수용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가장 낫기 어렵고 또 치료하기 어려운 환자에게 했어야 했다. 그리하여 다른 어떤 물리적 치료법보다도 이 수술은 정신과 의사들에게 어두운 불안을 드리우고 있었고, 그리하여 새 약물이 등장하자마자 제일 먼저 폐기했던 것이다.  

- 치료적 공동체는 한쪽 극단인 정신분석과 다른쪽 극단인 수용소 보호 관리주의 사시에서 균현을 취하고자 했던 대안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 노스필드는 모든 스태프와 환자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정서적 관계로 이루어진 (의학적으로 지시하는 관계가 아니라) 치료적 환경이다. 진심이 병동 운영의 기반이다.                     <메인>

- 치료공동체의 원리는 환자에게 권한을 주는 것, 정상적으로 생활하도록 해주는 것, 그리고 병을 일으킨 나쁜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지역사회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었다.

- 치료는 환자가 처해 있는 전반적 사회적 환경과 환자가 맺고 있는 모든 사회적 관계를 포함하는 것이어야 한다. 환자는 인간으로서 그리고 지역사회의 일부로서 대우받아야 한다     <비어러>

- 미국식 "지역사회 정신의학"은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고, 수용소에 있던 무능한 환자들을 대거 사회로 내보내 세상의 거친 풍파에 내던져 지게 했던 것이다. .......략....법령에 의해 만들어진 정신건강 센터는 지역사회로 하여금 정신병 환자를 돌보게 한 것이 아니라 중류층 신경증 환자에게 정신치료를 제공하는 장소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 반세기 동안 정신의학은 보호관리주의와 개인 정신분석 사이에서 덫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있었다. 덫을 벗어나기 위한 대안을 찾던 중 브로마이드 수면요법에서부터 ECT 그리고 사회적 모임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요법들로 정신의학을 이리저리 땜질하며 겨우 지탱하게 해주었다.
  이들 대안요법에는 충돌하는 패러다임도 없었고, 이론적 논쟁도 없었다. 의사가 하루는 사이코드라마를 지시하고 이튿날은 ECT를 시행하는 식이었다.
 
정신과 의사들은 일상의 진료에서 (가난한 환자에게) 수용소 관리를 할 것인지, (부자 환자에게) 정신분석을 할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갈등적 상황에서 극도로 절망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 효과가 확실한 정신약물이 등장하고 정신질환이란 단순히 인간관계의 문제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고, 정신분열증을 만드는 어머니 따위의 이론보다 훨씬 더 깊숙이 생물학적 현상과 관련된다는 근거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20세기 첫 반세기 동안 등장했던 내안 요법들은 이차 생물정신의학의 도래와 함께 거의 대부분 치료법 목록에서 지워져 버렸다.


Chapter 7  생물정신의학의 부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신의학은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뉘게 된다. 정신질환의 후천적 원인을 주장하는 정신분석 진영과, 유전적, 뇌화학적 요인 등 기질적 원인을 주장하는 진영, 그리고 그 사이의 절충적 시각이 혼재하는 과도기적 시기가 다가온다.

- 정신치료가 생물학적 패러다임에서도 일부를 차지하지만, 그것은  단지 특정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의사 환자 사이의 본질적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었지, 무의식적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발레 안무 짜듯 정교하게 쌓아 올린 정신분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 1차 생물정신의학은 .....통계적으로 무지했고, 대조집단과 비교함으로서 균형있는 시각으로 보려 하기보다는 일화적 사례에 의존했다. 

- 2차 생물정신의학의 선각자들은 양적 자료가 필요함을 인식하고, 정신분열증과 비교할 대조군으로 우울증환자를 선택했다. 또한 자료를 수집할 때 가정환경의 영향을 배제해야 함도 알고 있었다.

- 19세기의 통계는 가정환경과 유전성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환경의 영향을 배제한 유전성을 확인하려면 쌍둥이 연구와 입양아 연구, 이 두 가지가 반드시 필요했다. 

- "아이들이 한 가정에서 성장한다하더라도 아이들마다 환경으로 받는 영향은 다르다.".........
환경의 영향에 포함되는 것은 가정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 아세틸콜닌(Acetylcholine) ; 근육에 신경정보를 전달하는 물질로서 자율신경계와 운동신경에 존재한다. 중추신경계에서는 각성, 집중력, 보상체계 등에 관여하며 결핍시 기억장애, 특히 알츠하이머 치매와 연관된다. 최초로 발견된 신경전달 물질로서 이를 발견한 오토 뢰비는 노벨 생리학상을 받았다. 

- 여기서 지적하려는 것은, 레만과 같은 연구자들이 환자에게 비인간적인 실험을 했다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환자에게 해줄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내기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 약이 비록 정신병의 원인을 제거해 주지는 못했을지라도, 정신병의 주요 증상을 제거해 줌으로써 잠재성 정신분열증 환자도 수용소에 갇혀 있지 않고 비교적 정상적 생활을 꾸려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 클로르프로마진의 뒤를 이어, 각종 항정신증 약물, 항조증약, 항우울제 등 정말 풍요롭게 온갖 약물들이 쏟아져 나왔고, 이는 사회복지사업 정도의 수준에 머물던 정신의학을 가장 정밀한 약물 지식을 가진 전문분야로 발전시켰다. 

- 어떤 것은 나도 한번 끼어보자는 식으로 단지 경쟁을 위해 시장에 나온 약도 있었고, 어떤 약은 독성이 발견되어 축출되기도 했으며, 어떤 약은 정신의학 영역을 벗어나 길거리 암시장의 남용대상이 되기도 했다.  

- 새로운 약물 요법은 포스트와 동시대에 살던 정신과 의사들의 경험을 완전히 바꾸어 준 것이다. 
 
" 나는 고립된 시골에서 홀로 의사생활을 시작했고, 조금도 나아질 가망이 전무한 채 한없이 피폐해 가는 수많은 환자를 보며 손써볼 방법을 하나도 가지지 못한 채 두려움에 질려 있었다. 결국 정신과 의사들 전문인 그룹에 들어와서야 내가 의사로서 내 환자들을 도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 광기는 질병 그 이외늬 것이 아니다. 오직 의학적 치료만이 그 병을 이길 수 있다.       <레흐>

- 뇌와 마음 질병의 정체를 밝히고 병든 곳을 치료하는 도구로 약이 기능할 수 있다는 이 말에는 정신약물학의 본질이 담겨있다.

- 클로르프로마진과 초기 향정신성 약물이 발견되면서 정신약물학은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된다. "생리학적 메스" 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 하나의 신경전달물질-하나의 질병 이론은 꽤 논리적으로 보였다. (게다가 제약회사가 마케팅하기에도 매우 편리한 개념이었다.) 그러나 연관성이 인과 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 좌파 작가들은 정신의학에 "부르주아 계급"의 통제 의지가 숨겨져 있다고 보았고, 카를 마르크스의 용어를 빌리자면 주식과 채권을 소유한 중상류층이 사회를 통제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라는 것이었다. 여성주의 작가들은 남자 정신과 의사들이 가부장제 권력을 여성에게 주입하기 위해 남성 젠더를 대표하는 중개인이라고 했다. 

- 수용소에서 고프먼이 본 상황은 혐오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으며, 수용소란 일종의 "전체기관total institution " 으로서 환자를 유아화시키고 삶을 제한하는 폐쇄적 제도라고 해석했다.
"정신병원의 구조적 배열은 의사와 정신과 환자 사이에 극명한 차별을 유도하려는 목적으로 조직되어 있다."
 고프먼에 따르면, "입원하면서부터 환자는 영락, 강등, 모욕과 모독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략....................................
고프먼의 주장은 많은 부분 정당하기는 하지만, 그 기저에는 정신질환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이를 치료하겠다는 전문가들의 주장은 권력을 장악하려는, 부끄러움도 없는 핑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 1966년 사타바바라 캘리포니아 대학의 사회학자 토머스 쉐프는 소위 정신질환자라고 불리는 사람의 실제 문제는 "낙인찍기"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에 따른면 "가장 만성적인 정신질환자일지라도 부분적으로나마 최소한의 사회적 역할을 한다." "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의 반응이 그 사람이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에 가장 중요한 결정인자로 작용한다. "............략..........그러므로 정신질환이라는 진단명으로 그 개인을 설명할 수 없으며, 도리어 사회제도가 일탈을 통제할  능력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해석 방식에 대해서 세인트루이스의 정신과 의사 세뮤얼 구제는 "정신과 환자와 함께 평생을 보낸 우리 의사들은 물론, 심지어 환자의 가족들까지도 '낙인찍기 이론'은 근본적으로 웃기는 얘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수세기 전 윌리엄 화이트가 묘사했듯이, 친절하지만 가부장적인 감독관과 가족 같은 직원이 있는 그런 안식의 공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 "정신병원에서 가장 통렬한 장면(그가 수용소를 방문할 때마다 본 것이다)은 의사가 뜀박질하듯 서두르며 병동을 회진할 때 환자가 겁먹은 채 소심하게 의사의 팔이나 가운을 잡아끄는 장면이었다. " 

"선생님, 잠깐만 뵐 수 있을까요? "
그 대답은 항상 "미안, 다음에, 다음에."
어는 의사가 절망적인 어투로 말했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고? 환자 한 사람마다 개인적으로 돌봐야 한다는 것을 나도 잘 압니다. 그런데 내 담당환작 500명이나 되니 뭘 해줄 수 있을 것 같소?"

- 환자들을 따뜻이 받아들여야 했을 지역사회 구조는 요양원과 하숙집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
"도움 받을 길조차 없는 이들 거리의 사람들은 옷가지나 담배 혹은 술 한 병을 찾는 자들의 먹잇감이 되기 일쑤였다."................"그들은 개들과 함께 살아가도록 강요받은 토끼들입니다."

- 수십 년 만에 미국으로 온 한 영국 정신과 의사는, 탈기관화는 결국은 "퇴원해서 지옥에나  떨어져라" 식의 정치였다고 말했다.
" 내가 1950년대 초에 방문했을 때 비록 여러 모로 부적당하긴 했지만 최소한 그들은 집이 있었고, 비록 돌봄의 기준이 최상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돌봐지고는 잇었다. 그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수용소를 나온 이들 불행한 환자들은 만성 질병을 가지고 있고 도움 받을 길도 없어서 이제 싸구려 숙박소나 감옥, 혹은 길바닥 생활 이외의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끝없이 악화되어 갈 것이다. "

- 궁극적으로 볼 때 반정신의학 운동은 결국 실패했다. 지역사회 정신의학은 비록 그 기본정신은 의미 있는 것이었으나, 심각한 정신질환자를 치료하는 실질적 수단으로서는 신용을 잃었고, 지역사회에서도 호응하지 않았으며 지역사회 안에서 치유되지도 않았던 것이다. 

- 그들이 추론하기에, 쇼크치료법의 주된 장점은 "자기통제가 안 되던 환자로 하여금 다시 통제력을 찾게 해주고 그럼으로써 환자가 치료적 관계를 맺도록 하는 데 있다."
 


Chapter 8  프로이트에서 프로작으로 

새로운 약물은 거대한 수용소에 있던 환자를 사회로 쏟아 내는 탈기관화 현상을 재촉했다. 그러나 무방비 상태로 지역사회에 돌아온 환자들은 대부분 사회적응에 실패하고, 지역사회 정신의학 또한 실패한다.  온 세계를 휩쓸던 정신분석도 쇠퇴하기 시작했다. 제약 회사의 주도로 새롭게 쏟아져 나오는 약물이 대중의 욕구를 채워 주게 된 것이다. 이 변화에 큰 역할을 한 것은 항우울제 프로작이었다.

- 그러나 희망은 아직 이루어 지지 않고 있다. 도리어 정신의학은 대중의 요구에 좌우되고 기업의 가치관에 발목 잡혔으며, 소위 과학주의에 기반을 두었다는 질병 분류체계의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주요정신질환 분야에서만큼은 1970년대 이후 신경과학이라는 이름의 고속도로를 달려왔으나, 일상의 고통을 의학적으로 판단하는 데에서는 길을 잃어버린 듯하다.

- 일상의 세계에서는 유전학의 발자국도 희미해지고 신경전달물질은 증발해 버린다. 생물학의 무게는 줄어들고, 대신 사회 문화의 비중은 높아진다. 신경성 질환 영역에서만도 수없이 많은 진단명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로 있는 것은 서너가지 혹은 하나도 없을지 모른다.
일상의 세계에서 정신의학의 경계는 모호해지고 병리성과 특이성 사이의 구별조차 애매하다.

- 20세기 들어 정신의학이 당면한 가장 핵심적 문제는 스트레스를 심리화 하려는 대중의 새로운 경향에서 비롯되었다. 정신의학이 예전에 신경성 증상을 의료화했던 상황과도 다르고, 스트레스를 계급이나 젠더 문제 차원으로 사회화했던 것과 또다른 경향이기 때문이다.

- 의학의 한 축을 담당했던 정신의학은 심리학이나 사회사업 같은 비의학적 상담에 패배해 버렸다.
스트레스 받는 자아라는 인식이 보편적 문화로 자리 잡게 되자 스트레스와 연관된 병을 취급하던 전문분야인 정신의학은 더욱 위협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 신경과 의사들의 이색적 치료법에 불과했던 정신치료가 불과 100년 만에 실질적으로 국가적 차원의 기분 전환 거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 이렇듯 심리적 서비스에 대한 요구가 경악하리만큼 증가하자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첫째, 사람들이 질환이라고 간주하는 질환역치가 낮아짐으로서 심리적 불편함의 총량이 증가했다. 이 역치를 낮추는 데 정신의학은 분명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둘째 질환이 아닌 일상적 스트레스와 삶의 문젯거리를 의사에게 상담하려는 경향이 증가했다는 점이다.

- 정신치료가 개인적 스트레스를 다루기 시작하자 환자들은 정신과의 경계를 넘어 심리학자, 정신과 사회사업가, 그리고 소위 "정신건강 관리자" 라는 다른 서비스 종사자에게까지 흘러 들어가게 된다. 진료실에서 정신치료로 수입을 유지하던 정신과 의사에게 이런 식의 환자 유출은 정신과 비지니스에 경계 경보를 울리게 되었다.

- 아이들이 불안해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새로운 것은,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겪는 평범한 문제를 부모들로 하여금 질병으로 받아들이도록 설득해 온 정신과 의사들의 태도인 것이다.

- 모든 정서장애에 효과적으로 작용한다는 "프로작"과 같은 항우울제가 우울증 진단을 증폭시켰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의사들은 치료할 수 없는 진단명보다는 치료 가능한 진단명을 붙이는 경향이 있다.

- 남에게 골칫거리가 되는 사람을 환자로 만든다는 것은 비록 골칫거리였다 하더라도 실은 극히 정상적 상태를 병리화했음을 의미하낟. 따라서 성격장애를 포함하여 정신과 질병이라고 표식이 붙게 된 상태는 어느 수준 이상이어야 질병으로 간주되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인 질병역치가 매우 낮아졌음을 뜻하는 것이다.

- 여태까지 정신의학은 병의 판단 기준을 꾸준히 오른쪽으로 밀어내 왔고, 그래서 희귀한 병적 상태는 물론 일상적 불편함까지 모든 것을 정신과의 진료대상으로 포섭해 왔다. 즉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 인간조건이 정신과 의사에게 치료비를 지불하는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 정신치료분야에서 그의 아이디어는 다음의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당신은 할 수 있다. 당신은 멋지고 착한 사람이며, 당신안에 모든 것이 풍부하게 담겨있다. 그래서 기분만 좋아진다면 문제될 게 뭐가 있겠는가!"

- 반면 정신치료를 요구하던 사람들은 삶에 불만을 가진 불행한 사람들이었고, 그렇다고 정신질환이라고 진달될 만한 우울, 불안, 강박적 행동 등의 증상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이런 연구결과들은 정신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이 진짜 정신 질환자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 누구나 다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누구나 다 증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몇몇만 질병을 가지고 있다.                              <대니얼 프리드먼>

- 정신과 의사가 되기 위해 받는 수련 내용과 수련을 끝내고 사회에 나왔을 때 해야 할 일이 현저히 달랐던 것이다. 수련의로서는 주요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러나 사회에 나와 진료실에서 만나는 환자들은 일상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거나 아니면 주요정신질환 환자보다 더 큰 수익을 올려주는 신경증 환자들이었다. ..... 이런 상황에서 정신의학이 취한 방향은 정신으학의 본질인 주요 정신질환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길이었다. .........골치아픈 일상사를  무마하기 위해 정신치료를 받으려는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던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측면에서 본다 할지라도 정신의학은 과학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정신의학이 경쟁자들과 뚜렷이 구별될 수 잇는 길은 신경과학에 정통하는 것이었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사가 아닌 사람들과 낯붉히며 씨름하는 것은 정신과 의사들에게 도움이 되기 보다는 대중 앞에서 정신의학의 명예를 끌어내리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 미국의사의 69%가 정신 분열증이락 진단한 데 비하여, 영국의사는 단 2%만 정신분열증이라고 진단했다.
  이런 식의 국가 간 차이를 보고 의사들은 당황했다. 왜냐하면 이 결과가 암시하는 것은 정신의학은 과학적 정밀함을 추구하기 보다는 국가의 문화적 전통을 중시한다는 것이며, 그렇다면 정신과는 의학이라기 보다는 민속학에 불과해지기 때문이었다.

- 전쟁은 정신병이라는 진단명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사뭇 다른 부류의 환자들을 양산해 냄으로서 정신의학에 도전으로 다가오게 된다. 평상시에는 눈에 띄지않던 소소한 성격문제가 군에서는 중대한 일이 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분류법은 모든 곳에 필요했다. 그리하여 새로운 진단체계가 계속 만들어지고 정신과 병명은 늘어만 갔다.

- 그 당시 스피처는 정신과 진단을 전면적으로 새로운 방향에서 재조명하여 실재하는 질병의 실체에 가능한한 가장 가까운 진단명을 만들고자 결심했다.

- 우디앨런 증후군  ; 우디앨런은 미국의 극작가 영화감독 등등의 다양한 예능인이다. 만사에 대한 불만을 뛰어난 블랙 코미디 작품으로 표현하나 본인이 말할 때에는 박학다식함에도 불구하고 우물거리며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태도를 보였다. 또한 자신의 수양달과의 결혼에 대해 자신이 오랫동안 받았던 정신분석 이론을 거론하며 합리화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에 빗대어 인생에 불만을 가진 자신없는 태도의 어중간한 수준의 지식인을 의미한다.

- PTSD가 DSM-3에 포함된 이유는 핵심적 역할을 한 정신과 의사들과 차전 군인이 그 병명을 DSM에 포괄시키고자 수년동안 의식적으로, 그리고 매우 의도적으로 작업을 해왔기 때문이다. 결국 성공했고,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이들이 반대자드보다는 좀더 조직적으로 행동하고, 더욱 정치적 적극성을 가지고 있었고, 호기를 잡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 프로이트 분석이 아니라며 다른 그 무엇으로 정신치료를 할 것인가? 대안적 정신치료로 대두된 다른 방식 거의 모두가 효과 면에서는 비슷비슷했다. 대인관계 치료든, 그룹치료  든,  가족치료든, 사이코드라마든, 최면술이든, 마취치료법이든 무엇을 선택해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더욱 한심한 것은 심리학자 한스 아이젱크가 지적했듯이, 통계적으로 분석하여 비교한 결과 그 어떤 치료법도 뚜렷한 효과가 없었다는 점이다.
 
- 수백만의 미국인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을 망각하고......경제구조 맨 꼭대기에 있는 소수의 유복한 환자의 안영을 돌보는 전물가로서의 삶에 만족하고 살았다. ...........그래서 의사가 "관심을 가질 만한" 환자만 입원시키던 관행을 폐지하고, 맨해튼의 워싱턴 하이트 구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병원의 문호를  개방할 것을 지시하자, 입원 환자의 인구 구성이 극적으로 변화된다......모든 계층이입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 달리 말하면 삶에 불만을 가졌던 사람들이 2세기 전에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으나, 이제는 수많은 방식 중에서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정신분석은 그 많은 것 중 하나에 불과했다. 

- 집중적 정신치료는 여태까지 대조군 대비연구에 의하여 효과가 입증되지 않은 반면, 약물 효과에 대한 검사는 증명이 되었다는 것과, 대조군 대비 검사가 과학의 궁극적 표준이라는 것이었다. 


- 연속성 이론, 즉 정신병 환자가 나타내는 불안은 가벼운 질환의 불안보다 더 심하게 많이 나타나는 것에 불과하다는 연속성 이론은 옳지 않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둘 사이에는 폐렴과 감기 사이의 관계처럼 생리적 불연속성이 있게 된다.
..............................................달리 표현하자면, 정신질환이란 건강함에서 신경증으로 그리고 신경증에서 정신증으로 이행하는 연속선상에 있는 질병들이 아니고, 단지 정도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며 제각기 다른 독립된 질병실체가 있다는 말이다.

- 미용 정신 약물학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약물치료가 아니라 심리적 상태의 개선 혹은 미용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로 신조된 용어이다.

- 진료실에서는 공감어린 관계를 조성하는 것보다는 현실적으로 증상을 완화시켜 주는 것이 더욱 궁극적인 치료 목적일 것이다.

- 새로운 약이 야기한 문제점은, 이러한 약이 20세기 말에 이르러 너무나 유행하게 되자, 환자들이 보기에 의사는 의사 환자 관계를 치료적으로 사용하여 상담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신기한 약을 전달해 주는 사람으로만 간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최근에 와서는 의사와의 상담은 오직 환자 자신의 이미 선택해 놓은 약을 처방받기 위한 것이며, 자시느이 문제를 해결할 길은 오직 약 뿐이라고 생각한다.

- 제약회사마다 경쟁적으로 향정신성 약물 개방에 뛰어들게 되자 이들은 정신과 의사의 진단 감각을 왜곡시키기에 이르렀다. 파고들 만한 틈새시장을 만들어 내기 위해 제약 회사들은 질병 범주를 부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상태를 질병이라고 명명했다 하더라도 별로 주목받지 못하던 질병이, 제약회사가 치료약을 개발해 내놓게 된면 가히 유행성 전염병처럼 곧바로 대중성을 획득하게 된다.

- 의학분야에서는 여태까지 흔히 보아 왔듯이, 치료방법이 개발되면 그 질병의 존재를 알아채기 쉬원진다.
                                       <데이비드 할리>

- 쿤이 말한 과학주의란, 살아가며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어려움과 곤란을 우울증으로 명명하여 질병으로 전환시켜 버림으로써, 인생사를 우울증이라는 척도로 측량하고 이 모든 것은 '기적의 약'으로 치료될 수 있다고 주장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정신과 스스로가 제약회사에 대거 끌려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과학의 한 분야인 정신의학은 약물 쾌락주의라는 대중문화를 양성하게 되었고, 정신질환에 걸리지도 않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새로운 약을 갈구하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약을 먹으면 자의식의 무거움을 떨쳐버릴 수 있고 날씬한 몸매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200여 년의 기간 동안 정신과 의사의 역할은 치료적 수용소의 치유자에서부터 프로작 처방의 문지기로까지 변화되어 왔다.

- 마음의 병이 다른 의학적 질병과 다를 바가 없다면, 여기서 불편한 질문이 대두된다. 누가 정신과 의사를 필요로 할 것인가? 

- 이제 정신의학 자체가 의료화되었으니 독립적인 전문분야라고 정당화할 근거가 무엇이어야 하겠는가? 더욱이 심리학자와 사회사업가들이 집중적으로 정신치료사 훈련을 받음으로서 정신치료는 그들에게 옮겨갈 것이고, 뇌 생물학 분야는 뇌 영상촬영 결과와 뇌 기저핵 병소를 더 잘 판단할 수 있는 신경과 의사에게 점유될 가능성이 크다. 정신과 의사에게는 무엇이 남아 있을 것인가?

- 약물치료에 의한 생물학적 증상 개선과 환자의 왜곡된 인지 심리상태에 공감해 주는 의사와 얘기를 나누는 것은 상승효과를 일으킨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의사이다. 심리학자나 사회사업가의 정신치료 기술을 평가절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의학의 역사를 보면, 자신을 돌보는 사람이 다름 아닌 의사라는 것을 알게 되면 치료 효과에 대한 환자의 기대감은 더 커졌다. 
자기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단순히 친구나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 존경할 수 있는 의사라면 심중을 토로하면서 얻는 카타르시스는 더 클 것이다. 

- 고통받는 인간은 치유자의 모습으로 동정을 보이는 사람의 말에 반응한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이를 알고 있었지만, 이것이야말로 정신과에 아직껏 남아 있는 희망이다. 


옮긴이의 후기  

- 프로작의 유행이 의미하는 것은 약을 복용함으로서 정신질환의 오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셰련된 도시문화에 적응하는 서이며, 약은 옷차림이나 화장처럼 '자기 변형'의 방식일 뿐이라고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후 온갖 삶의 조건에 대한 약들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 금주 보조제, 금연보조제, 식욕 억제제, 수줍음에 선택적으로 작용하는 약물, 쇼핑중독 등의 중독 행위에 작용하는 약 등등 정신과 약물은 우리 삶의 구석구석마다 등장하여 해결책을 제시해 주고 있다. 

- "전 세계적으로 2000만 명이 프로작을 복용하고 있고, 이제 우리는 병적 우울증 때문이 아니라 일상의 기분변화와 실존의 고통을 약물로 해결하는 '기능개선 정신약물학'의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가디언 지 , 2002>

- 기능개선 정신약물학 혹은 미용정신 약물학 이라는 용어는 소위 정상범위안에 있는 사람에게 약을 제공하여 행동변화를 일으키는 것으로서 가벼운 증상을 약물로 치료하는 고식적 정신약물학과 구별되기도 한다. 후자는 이미 오래전부터 실행되어 오던 것이나, 선택적 약물사용 문화는 이 둘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고 있다.

- 스트레스와 삶의 예봉에 둔감해지기 위해 정신과 약물을 사용할 경우 고통의 원인이 된 일으킨 상황을 개선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노력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 과거 의료이념이 질병의 치료와 고통의완화에 있었다면, 현대 사회는 기능 개선과 행복을 위해 의료가 서비스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질 경우 이에 소요되는 재정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될 것이며 전통적 의료이면의 일대 전환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현대 의료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 정신의학은 정신의학 자체의 정당성이라는 질문 앞에 서 있다.
개인의 특성과 성격이 알약에 의해 변형될 수 있다면, 개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근본적 특성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과학적 정신의학이 전제하는 정신질환의 실체를 규정하기 위한 기준은 무엇인가? 소위 '정상성'인가, 아니면 '주관적 불편함'인가? 주관적 불편함일 경우, 진단분류 개혁을 통해 일반의학의 한 전문분야임을 입증하려던 그동안의 노고가 무색해 지기 때문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정신과에 대한 요구가 이처럼 짧은 기간에 폭발적으로 증가한 적은 없었고, 동시에 지금처럼 정신과에 냉소적인 비판이 강한 적이 없었다. 작금의 '정신질환 대유행'을 단순히 정신과의 전성기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의료는 질병을 넘어서 삶의 불행을 돌봐야 할 책임이 있는가? 어느 지점에서 '필요'가 '욕구'로 넘어가는가? 다양한 치유방식과 온갖 심리적 치료법이 난립해 있는 현실에서 정신의학은 과연 일상의 불행과 삶의 문제를 '치료'할 역할을 정당하게 부여받은 것인가?

- 정신의학이 주장하는 과학적 패러다임은 양날의 칼과 같다.
생물학적 패러다임을 고수한다면, 지금과 같이 엄청난 수의 사람이 원하는 기능개선 정신약물학을 포기하고 중증 정신질환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반대로, 유행병이라 불릴 정도의 환자 몫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정신의학은 대중의 욕구와 가치관에 영합함으로서 더욱 일용품화되고 결국은 탈의료화의 방향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 신경과 정신과 합병에 관한 해묵은 논쟁이 요즘 다시 고개를 들고 있음은 뇌과학을 주장하는 정신의학이 기로에 서 있음을 반영하낟.

- 따라가야할 하늘 위 지표(signpost in the sky)는 아마도 다음의 질문이 아닐까정신과 의사가 아니면 다가갈 수 없는 고통은 무엇인가? 돌봄의 방식을 정신과만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분야는 무엇인가?
posted by Dr.Hannah Son
:
독서 2010. 6. 14. 19:57




고용없는 성장 비정규직 양산, 빈부 격차의 확대로 인한 사회 갈등과 삶의 질 저하를 감수하고서라도 숫자상의 성장만 이루면 된다고 여기는 가치관이 변하지 않고서 우리의 미래가 평화로울 수 있을까?   <역자 후기>

 "우리는 보석의 값을 받고 빵을 팔고 있다" 고 개탄했던 닥터 노먼 베쑨처럼 폴 파머는 오늘날 의료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너무나 거대한 값으로 제공되고 있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상아탑에서 의료란 고귀한 것이라고 배웠건만 면허장을 쥐고 강호?에 나온 내게 이것은 고부가가치의 산업으로서 나 개인의 경제적인 신분을 한계단 올려줄 수단이 되어있다.

효율이 없어 비용을 제공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진료하고 그들을 위해 고민하는 일을 몇몇 이상주의자들에게만 맡겨놓는것은 정당하지 않다.
이기심을 누르고 연대에 동참하는 것이 나에게도 가능할까..
내가 불가능 하다면 너에게는 가능할까.


쥐와 바퀴벌레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경쟁하며 살아간다.
정의와 관용의 법칙에 따라 사는 것은 인간의 특권이다.                      _ 웬델베리

세계인권선언문 제 25조
모든 사람은 의,식, 주, 의료 및 필요한 사회복지를 포함하여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안녕에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와 , 실업, 질병, 장애, 배우자 사망, 노령 또는 기타 불가항력의 상황으로 인한 생계 결핍의 경우에 보장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세계인권선언문 제 27조
과학의 발전과 그 혜택을 공유할 권리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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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서로를 갈라놓는다. 침묵을 강요당하는 대중이 질문하지 못하게 하며, 심판받는 자들이 심판하지 못하게 하며, 고립된 개인들이 함께하지 못하게 하며, 영혼이 그 조각들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게 한다.
                                                                 -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분열'

때로는 경제적인 빈곤이 우리가 누리는 자유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데, 빈곤은 사람들이 굶주림에서 벗어나거나, 영양을 충분히 섭취하거나, 치료 가능한 질병을 치료하거나, 옷과 집을 제대로 구할 기회를 얻거나, 깨끗한 물과 위생시설을 이용할 자유를 박탈한다.
또한 방역 프로그램이나 체계적인 보건 의료 및 교육제도, 지역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기관 등의 공공시설 및 사회적 지원의 부족도 자유를 크게 제한한다.
한편, 억압적인 정권이 정치적 자유와 시민권상의 자유를 부정하거나, 시민들이 그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제에 관한 결정에 참여하는 것을 제한하는 등, 노골적으로 자유를 침해하기도 한다. 
                                                                    - 아마티아센 '자유로서의 발전'


- 우리는 탄생과 죽음 사이에 약간의 의미있는 것들을 집어넣으려고 노력하고, 때로는 꽤 성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처럼 사망 연령의 중앙값이 5세 미만인 곳에서는 그 어떤 의미있는 것도 경험하기 쉽지 않다....략....
그런 삶에도 물론 탄생의 신비(기억하지 못한다), 약간의모유(못 먹을 수도 있다), 친족 간의 애정(대개 뿔뿔이 흩어진다), 어쩌면 약간의 교육(대부분은 받지 못한다), 약간의 놀이(전염병과 공포속에서)가 있기는 하겠지만, 곧 모든 것이 끝난다(불평을 하건 말건).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계속 돌아간다.

- '제1세계'의 빈곤층은 사실상 '제3세계'에서 살고 있다. 예를 들면, 미국의 가장 큰 도시에 사는 흑인의 평균수명은 훨씬 가난한 중국이나 인도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도 짧다. 사는 장소만으로는 수명을 연장시킬 수 없다. 

- 예방 가능한 질병은 예방할 수 있으며, 치료 가능한 칠병은 치료할 수가 있고, 조절 가능한 질환은 조절하면 된다.
  자연이 주는 고통에 대해 불평하기 보다는 공포를 불러오는 사회적인 원인과, 증오를 용인하는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 인권의 침해는 우연히 일어나지 않으며, 그 분포와 영향력 역시 무작위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인권의 침해는 근본적으로 권력에 의한 병리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누가 고통을 받고 누가 보호를 받는지를 결정하는 사회적 조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 가난한 아세피의 죽음..그들은 자신의 가족들로부터는 마지막까지 사랑을 받았지만, 사회 관심이나 도움은 전혀 받지 못했다. ....................략........................
아세피가 짧은 생애 동안 직면한 권력의 불평등에는 관료주의(충분한 대책없이 댐을 건설해서 주민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바람에 이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 계급(아세피와 그녀의 고용인, 그리고 오노라 대위와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성별(그녀가 만났던 남자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녀의 지위와 관계된다), 계층화된 사회(가난한 자들을 위한 공공시설이나 의료 지원의 부재) 등이 있었다. 
아세피는 물리적인 폭력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구조적인 폭력의 희생자 였다. 

- 권력의 불균형은 소리없는 만행을 실제로 저지를 수 있다. ...........략...........
권력의 불평등은 여러 가지 기회를 제대로 나누어 갖지 못하게 한다. 이렇게 해서 통제의 지렛대로부터 멀리 밀려나 있는 사람들의 삶이 파괴되며, 그들의 생명까지도 다른 사람들이 내린 결정의 지배를 받게 된다. 

- "가난은 반대하지만 불평등은 괜찮다고 본다"라는 말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가난과 불평등을 서로 분리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입장에서 반박할 수가 있는데, 사회 경제적 불평등으로 속박받는 사람들에게 불평등이 미치는 향을 평가하는 것도 그 중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서문

- '인권'은 사회 정의 의 흐름이나 양심적인 운동이 되기보다는 갈수록 자신들만의 통과 의례와 이력을 갖춘 일부 선택된 전문가 집단의 특화된 언어가 되고 있다. 이런 인권 운동은, 내가 목격한 몇 곳에서는, 갈수록 명예의 표지와는 동떨어진 특권의 보증서가 되어가고 있다. 

- 쿠데타의 특징 하나 ;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아이티처럼 군대가 해산된 지 10년이 지난 나라에서 군인들이 갑자기 숲속에서 걸어 나올 수는 없다. 그들은 재조직되고, 재훈련되고, 재무장 되어야 한다. 그리고 물론, 무언가가 조직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조직을 해야만 한다.

- 이 지역의 인권단체들은 그 자금을 대고 지원을 해주는 국제기구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존재한다. 지역의 문제는 정의로운 방법으로 해결해야 할 인간의 문제라기보다는 프로젝트 운영비를 따낼 기회로 정의되는데, 이때문에 인권 개년은 희석되고 대중적인 설득력이 떨어진다. 

- 사회 경제적 권리  ;의료, 주택, 깨끗한 물, 교육 등의 권리가 포함되기에, '가난한 자들의 권리'라 부르기도 한다. 

- 아프리카에서 인권의 실현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사실상 삶과 죽음의 문제인 경우가 많다. 

- 인권 차원의 접근이 아니라면, 생명을 살리는 이 치료제는 돈을 지불할 수 있는 자들에게만 돌아갈 것이다. 

- 불평등의 간극이 커지면 갈등도 커지게 된다. 남아있는 유일한 희망은 폭력, 테러리즘, 전쟁이라는 돌발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이 현대에 들어와서 매우 심화된 불평등의 대가로 생겨난다는 사실에 대한 국제적인 논의와 , 나아가서 얼마간의 성찰을 불러일으킬 여지가 아직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있다. 

- 가난을 관리하기 위한 방폄으로 더강한 무력과 억압을 이용하는 것이 선호되고 있기는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가난, 질병, 인종차별 등에 대한 가시적이고 장기적인 해결책을 찾아 내지 못한다면 폭력과 혼란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머리말

벼룩이들은 자기들을 위한 개 한마리를 살 것을 꿈꾸고, 무명씨들은 가난에서 탈출할 것을 꿈꾼다. 어느 마술과 같은 날에 갑자기 행운이 머리 위로 비 오듯 내리기를...양동이로 퍼붓듯 쏟아지기를. 그러나 행운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어쩌면 영영 내리지 않을 것이다. 행운은 가랑비만큼도 내리지 않는다. 무명씨들이 아무리 기원을 해도, 왼쪽 손이 간지러워도, 하루를 오른발을 내딛는 것으로 시작해도, 새해에 새 빗자루를 장만해도.

무명씨들 :무명씨의 자녀들, 아무것도 쇼유하지 못한 자들, 무명씨들 :보잘것없는 자들, 보잘것없이 된 자들, 토끼처럼 뛰어다니면서, 죽어가면서, 매일매일 쥐어짜이는 자들
아무것도 아니지만, 무언가가 될지도 모르는 자들
언어가 아니라 방언을 쓰는 자들
종교가 아니라 미신을 믿는 자들
예술품이 아니라 수공예품을 만드는 자들
문화가 아니라 민속을 전승하는 자들
인간이 아니라 인간 자원들
얼굴은 없고 팔만 가진 자들
이름은 없고 번호만 가진 자들
세계사의 무대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지역신문의 사건사고란에 나타나는 자들
무명씨들, 그들을 죽이는 총알만큼의 가치도 없는 자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무명씨들">

일부이야기의 등장인물은 근래에 여러 작가들이 '작은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다. 나는 그것이 거만하고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는 '작은 사람들'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당신 만큼이나 크다. 당신이 누구이든
                            <조셉 미첼,  "맥소리의 멋진 살롱">
 
- 주민들은 집단 학살과 강제 이주를 겪고도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는데, 교사들은 이들을 마치 어린애 다루듯 대했다. 주민들은 주요도시들, 우리 단체와 마찬가지로 좋은 의도를 가진 단체들, 모든 질문에 '정답'을 가지고 있는 미국의 대학들로부터 가져온 주제에 관해서 질문을 받고 있었다.

- 라틴 아메리카에서 신자유주의 정책과 이데올로기는 일반적으로 정치, 사회적 삶을 '시장의 힘'이라고 부르는 일련의 과정에 예속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성인시절의 대부분을 아이티와 미국의 가난한 환자들 사이에서 살아온 의사로서, 나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내 환자들에게 이롭게 작용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의료, 교육 및 사회 서비스가 기본적인 인권으로 받아들여지도록 하기 위해 싸워왔다.

- 자유주의자들은 자유주의 국가 (개혁주의적이고, 법치주의적이며, 어느 정도는 자유지상주의적인 국가)가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의 국가라고 주장해왔다. 자유주의 국가의 보호로 자유를 누린 비교적 소수의 집단에게는 이 주장이 아마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집단은 모든 사람으로 확대되지 못하고 언제나 소수로 남아있다. 

- 권력을 가진 자들은 야만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우리를 안심시키려 하지만 세상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 "자유주의자란 어떤 사람들이지?" "세상의 모든 나쁜일은 그저 우연히 일어난다고 믿는 사람들."
인권의 침해는 우연히 일어나지 않으며, 그 분포와 영향력 역시 무작위로 나타나지 않는다. 인권의 침해는 근본적으로 권력에 의한 병리증상으로 나타나는 겋이며, 누가 고통을 받고 누가 보호받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사회적 조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 구조적인 폭력
;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다양한 공격
즉, 극단적이거나 상대적인 가난, 인종차별에서부터 성차별에 이르는 사회적 불평등, 명백한 인권 유린에 해당하는 극단적인 형태의 폭력.
그 중 일부는 구조적인 폭력으로부터 탈출하려 한 것에 대한 처벌로 일어난다.

- 가난한 사람들이 쉽게 치료할 수 있는 질병 때문에 죽는 것을 투표권을 통해서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드러났다...... 략........... 사회 경제적 권리가 보호되지 않으면 시민권도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다.

- 사회 경제적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인권선언문에 명시되어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너무 많이 요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질 때가 많다.

- 분명 이상적인 목표를 위한 투쟁에서도 실용주의는 나름의 역할이 있다. 너무 많은 것을 얻으려다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인권단체들이 순수한 원칙에 기반을 둔 인권 운동만 고집하며 돈이나 음식, 의약품 등을 지원하는데 주저하다 보면, 우리가 보호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정작 시급하게 필요로 하는 것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돈의 테러리즘 ;갈레아노
   세계 금융계의 큰손들은 돈으로 테러를 자행하는데, 이들은 왕이나 군사령관이나, 심지어는 교황보다도 힘이 더 세다. 그들은 절대로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 그들은 아무도 죽이지 않는다. 그저 벌어지는 광경에 박수만 보내다.
그들이 부리는 초국적인 전문가 집단이 우리의 나라들을 다스린다. 그들은 대통령도 총리도 아니며, 선출된 적도 없지만, 봉급수준과 공공 지출 규모, 투자와 매각, 물가, 세금, 이자율, 보조금, 태양이 언제 뜨는지, 비가 얼마나 자주 오는지를 결정한다.
   한편 감옥이나 고문실, 집단 수용소, 사형실과 같은 것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의 피할 수 없는 결과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전문가들은 면책 특권을 주장하면서 "우리는 중립" 이라고 주장한다.

- 법과 헌장이 불충분하다면, 그리고 이상적인 조건에서가 아닌 한 이를 실현할 수가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의사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우선 가난과 불평등에 대처하는 것이 가난한 사람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벌이는 다른 어떤 선의의 노력보다도 중요하다.
돈의 테러리즘은 지금까지도 드러나지 않게 숨어있고, 현존하는 법규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 연구자들은 선물교환, 축일 의식, 결혼식, 세례, 노동 축제 등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했다. 그러나 안데스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른 장면들은 전혀 기술하지 않았다. 종기가 생겼어도 치료받지 못하는 소녀, 출산 중 출혈로 죽어 가는 여인, 어두컴컴한 진흙 벽돌집에서 갑자기 숨을 거둔 아기를 안고 울음을 터트리는 부부 등을 말이다.

- 왜 우리가 용서를 받아야 하는가? 무엇에 대해 용서를 받는다는 것인가? 굶어죽지 않은 것에 대해서? 우리의 비참한 상황에 대해 침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경멸당하고 쫓겨나야 하는 우리의 역사적인 역할을 조용히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해서?....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살아 있다는 것을 이 나라와 전 세계에 보여준 것에 대해서?                    <멕시코 사파티스파 반군 지도자들>

- 학자들은 이 반란을 민족적인 봉기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다. 인류학자들 중에는 민족적인 자긍심에는 환호하면서, 반군들이 민족에 관계없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적, 경제적 권리를 요구한 것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당혹해 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 그들이 성명서를 통해서 무슨 말을 하는가를 관찰하기 보다는 무엇을 행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 신자유주의 시대(이것이 이루가 원하는 표현이라 해도)는 실재로는 외면하는 시대, 구조적인 폭력의 원인과 그 결과에 대해 눈을 감는 시대다. 우리가 이 시대를 무엇이라고 부르건, 인권침해를 이해하고 예방하기 원한다면 권력과 인권침해 사이의 연결 고리들을 함께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인권이 짓밟힌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여 보면, 정치적인 권리가 사회 경제적 권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또한 사회 경제적인 힘이 없이는 정치적 권리 역시 실질적으로 보장됮 않음을 알 수 가 있다.

- 깨어이쓴 양심보다 더 본능적인 것은 없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 구조적인 폭력이란, 다시 말하자면, 누가 위험에 노출되어 피해를 보고, 누가 보호받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사회 경제적 불공정성을 말한다.

- 교역의 증가 자체를 두려워할 것은 아니다. 기술 발전 역시 범인이 아니다.  '세계화'를 이런 방향에서 보는 것은 잘못된 접근이다. 1980년경부터 진행되고 있는 지속 가능하지 않은 금융환경으로의 통합 과정이 문제인데, 이 체제에서는 부가 가난한 국가에서 부유한 국가 쪽으로 흐르고, 부유한 국가 안에서도 주로 경제적 상층부로 흘러들어 간다.
   이런 흐름의 결과로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불평등과 지속 가능한 발전을 향한 진보는 사실상 멈추어 섰다. 중심부 주변부 의존성이나 부채 노예와 같은 신식민주의의 양상이 다시 등장했는데, 가난한 이들이 처한 이 운명에 대해서 부유한 국가들은 일말의 책임감도 느끼지 않고 있다                                  <제임스 갈브레이스>

- 사회 정의가 보건과 공공 의료의 중심에 놓이지 않으면 보건 분야에서 유행하고 있는 ('비용 효율성'에서부터 '지속가능성'이나 '재현성'등의) 개념들은 의료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
   인권 시각에서 보건 경제학과 보건 정책에 접근하는 것은 효율성을 위해 형평성을 포기함으로써 생기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  결국, 사람들이 피할 수 있는 질병으로 죽어가는 것을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할 때에만 불평등한 제도를 효율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 건강에 초점을 맞추면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중요한 방향으로 인권 담론을 이끌어 갈 수가 있다. 건강권은 사회적 권리 가운데서도 가장 논쟁의 여지가 적은 권리이며, 이 분야에는 의사에서부터 지역사회 보건 활동가에 이르는 수많은 보건 의료계 종사자들이 여전히 열정과 책임감을 가지고 일하고 있다. 또한 여기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주로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이 인권침해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킬 수 있을 것이다.

- 부유한 국가라 하더라도 사회적 불평등이 큰 사회의 보건 지표가 비슷한 수준의 더 평등한 사회에 비해 더 열악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략............우리는 이미 세계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 따라서 국경의 안쪽 뿐만 아니라 국경 너머에도 존재한는 가파른 불평등에 대해서도 형평성을 요구해야 한다. 

- 진실을 말하고 희생자들을 돕는 일이라면, 환영받지 못하더라도 진실을 말하자. 그런 사건과 상황을 목격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우리에게는 우리가 목격한 권력의 병리 작용의 정체를 드러내고 앞으로도 계속 드러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증언

- 진실이라면, 전해져야만 할 이유를 타고났다면, 그 누구도 인간의 목소리를 막을 수 없다.
입으로 못하면 손과 눈으로, 아니면 땀구멍 혹은 그 무엇을 통해서든, 우리 모두에게는 다른 이들에게 무언가 할 말이, 무언가 축하받을 만하거나, 용서받아야 할 것이 있기에.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인간의 목소리를 축복하며'>

- 자기성찰을 찬미하며

대머리 수리는 스스로에게 반성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양심의 가책은 검은 표범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피라니아는 그들 행동의 정당성에 아무런 의심을 갖지 않는다.
방울뱀은 주저함 없이 스스로를 증명한다.

자기 비판적인 재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메뚜기, 악어, 선모충, 말파리
본 성대로 살고, 그것에 만족한다.

범고래의 심장은 백 킬로나 나가지만
어떤 면에서는 가볍다.

깨어있는 양심보다
더 본능적인 것은 없다
태양의 세 번째 행성에서는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 폴라 박사는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안다. 그는 잘 듣도록 교육받았다. 그를 찾아오는 중산층 환자들은 대부분 단순한 감기 증상에 대해서도 족히 10분 이상씩 설명하곤 한다. 그가 침묵 속에서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들을 보는 곳은, 통증의 강도나 위치나 그 특성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빈민가뿐이었다. 진흙과 양철로 만들어진 오두막에서, 환자들이 아무것도 덮지 못한 채 흙바닥에 누워 있는 그곳에서, 그는 피부의 떨림이나 고통스러워하는 눈빛만을 보고 스스로 판단해야 했다.                      <그레이엄 그림  '명예 영사'>

- 의사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부상이나 고통의 정도가 통증을 호소하는 정도와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 사실, 억눌린 계층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설사 아프고 피곤하고 다쳤다 하더라도 따뜻한 대우를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략..........그들은 특권층이라면 당연히 받는 것과 같은 정중한 대우를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략...... 때로는 의사가 표면의 침묵을 건드려서 고통에 찬 절규가 터져 나오게 해야 할 때도 있다.......략............
그러나 때로는 표면의 침묵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그들을 더 존중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런 경우에는 플라 박사처럼 자신이 할 일만을 조용히 하는 것도 존중할 만하다.

- 솔직히 말해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곤경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그들을 돕는 데 특별히 더 효과적인 것도 아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에 대해 연구하지 말라. 당신이 그들에 대해 말하는 것들이 모두 그들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이용될 것이다." (필립 부르주아)

- 나는 공공연하게 가난한 병자들의 편에 서 있으며, 나 스스로 중립적인 존재가 되고자 한적도 없다. 나는 그런 '중립'은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이 책에 서술된 구조적인 폭력을 은폐하거나 그에대한 핑계거리를 제공할 분이라고 주장한다.

- 증언을 하는 것은 타인을 대신해서 타인을 위해서 하는 일이다. (비록 그들이 죽고 잊혀다 하더라도)...략....
설사 증언의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람들이(침묵 속에서든 울부지음과 함께이든) 이 책에 서술되어 있는 불의를 감내하는 고통과는 결코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1장> 고통과 구조적 폭력에 대해 ;세계화 시대의 사회적 경제적 권리

- 사람들은 일인당 소득을 어디에서 벌어들이까? 그것을 알고 싶어하는 굶주린 영혼이 하나둘이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숫자가 사람보다도 더 잘 산다. 이 풍요의 시대에 몇이나 되는 사람이 풍요롭게 사는가? 개발에 의해 삶이 개발된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저 작은 숫자들과 사람들'>

- 그 어떤 형태의 치료법이나 정책을 동원해도 모든 고통을 한 번에 다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고통에는 "위계"가 형성되기 마련이다.

- 아이티 중앙 고원에서는 고통이 일상적으로 존재하는 삶의 조건이며, 이곳에서는 매일매일의 삶이 마치 전쟁과 같다.

- 모든 지표는 소농들의 목숨이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부지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 우리의 풍요가 그들의 고통과 직접 관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 풍요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의 의식 속으로 비집고 들어올 기회는 무척 드물다.

- 내차 찾던 질서는 찾지 못했다.
대신 권력의 쥔 자들의 손에서 갈수록 자라나는 사악하고 면밀하게 의도된 무질서를 찾았을 뿐.
한편, 더 살기 좋은 세상, 굶주림이 적은 세상, 더 희망찬 세상을 위해 절규하던 사람들은 감옥에서 고문으로 죽어간다.
가까이 오지 마시라. 
내 주위에는 오물로 인한 악취가 온통 진동하니까.                   <클라리벨 알레그리아  "다리로부터">

- 제가 누더기 옷을 입고 선생님 앞에 서면
  선생님은 저의 벗은 몸을 구석구석 진찰 하십니다. 
  제가 아픈 이유를 찾으시려면 누더기를 한번 흘끗 보는 것이 더 나의 겁니다. 
  저의 몸이나 옷이나 같은 이유 때문에 닳으니까요.

  제 어깨가 아픈 것이 습기 때문이라고 그러셨지요.
  그런데 저희 집 벽에 생기는 얼룩도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말씀해 주세요.
  그 습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거지요? 
                                     <베르톨트 브레히트 "노동자가 의사에게 하는 말">

- 어떤 족류의 고통은 관찰하기 쉬운 반면(이는 수많은 영화 소설 시의 주제가 되고 있다) 구조적인 폭력은 그것을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을 좌절시킬 때가 너무나도 많다.

- 고통이 무서운 이유는, 그 엄청난 양 때문만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권리는 고사하고 목소리 한번 내보지 못한 익명의 희생자들의 면면 때문이다. 

- 간단히 말해서, 극심한 고통은 인지하는 것은 그것에 대해 설명하는 것과 는 전혀 다른 일이다. 

- 우리에게는 만족스러운 이 세계가 그들에게는 철저하게  파괴적인 세계와 동일한 세계다.

- 기회를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미안합니다.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던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사과합니다. 내가 잘못했다면, 
  제발, 행복이여, 그대를 당연히 누려야 할 것으로 여겼다고 화내지 마세요.
  나의 기억이 흐려지는 것에 대해 죽은 자들이여, 이해해 주세요.
  내가 매순간 간과하는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시간에 사과합니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하나의 작은 별 아래서"> 

- 물론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가난이 아주 많이 있다. 그러나 더 비참한 것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비참하고 위험한 삶을 살다가 일찍 죽을 수 밖에 없도록 강제된다는 것이다. 이런 곤경은 보통 낮은 소득과 관계가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불충분한 의료와 영양 공급, 사회적인 안전장치 부족, 그리고 사회적 책임과 복지 행정의부재를 반영한다.

- 일부 인류학자들은 외부 관찰자에게는 개인의 존엄성에 대한 명백한 공격으로 해석되는 것이 실제로 그 사회에서는 오랜 세월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문화적인 관습일 수도 있다고 주장해 왔다. ..............략....................
많은 학자들은 어떤 관행이 단지 그 문화권에서 전해 오는 가치관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불평등을 묵인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 문화는 고통을 설명해 주지 않는다. 최악의 경우 변명거리를 제공할 뿐이다.

- 극단적인 고통을 당할 위험의 정도를 하나의 축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나의 변수로 편리하게 설명하려는 시도는 엉뚱한 것을 윈인이라고 주장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부와 권력이 개객인의 여성, 게이, 소수인종을 고통이나 인간 존엄성에 대한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가난은 성별, 인종, 성적 지향 등에 따늘 보호 효과를 약화시킬 수도 있다.

- 인간의 극심한 고통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가능하며, 현재 그 고통의 대부분을 가난한 사람들이 과도하게 감내하고 있다. ...략.........."가난은 수태의 순간에서부터 무덤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삶의 모든 단계에서 파괴적인 영향력을  휘두른다. 가난은 가난으로 고통을 받는 모든 이들을 비참하게 만들기 위해 가장 치명적이고 고통스러운 질병을 고안해 낸다."

- 우리는 가난한 다수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은폐하기 위한 또 다른 거대한 장벽이 제3세계 안에 세워지고 잇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힘 있는 계층을 성가시게 하지 않고 역사의 침묵 속에서 죽어 갈 수 있다ㅗ록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에 장벽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칠레의 신학자 파블로 리처드>


<2장> 전염병과 억류 ; 관타나모, 에이즈 그리고 검역

- 미국의 여행 금지 조치와 대중 및 학술 매체가 일관되게 전달하는 왜곡된 묘사로 말미암아, 북미의 대다수 사람들은 이 가난한 제3세계 국가가 경제위기를 겪는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의 공격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강력한 국가의 수도인 워싱턴보다 높은 보건 의료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아비바 촘스키 "좋은 사례라는 위협 ; 쿠바의 보건과 혁명">

- 어쨌든 나도 언젠가는 죽게 될 거야. 그래도 이런 식으로는 안돼.  <아이티 난민 욜랑드 장>

- 아이티인과 HIV에 관련해서 미국이 보인 반응의 바탕에는 아이티인들이 에이즈에 감염되어 있고, 더 중요하게는 다른 사람들에게'감염시킨다'는 완고한 인식이 깔려 있다.

- 클린턴과 그 주변 사람들에게 관타나모의 사건은 혐오스러운 일이자 범죄가 아니라, '비용 효율성'의 문제였던 것이다.
- 굶주리는 이웃의 정치 체계가 낙후되었다는 것을 이유로 절대적으로 필요한 원조를 미국이 제공하기를 거부한 사례가 또 있었는가?           <마이애미 해럴드 사설>

- 정의 없이는 화해도, 민주주의도 없다.   <인권변호사 브라이언 컨캐넌>


<3장> 치아파스의 교훈
- 치아파스는 가난하지 않다. 그러나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가난하다.

- 우리는 우리의 관심을 경제 분석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소득과 상품으로부터 돌려서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소중히 여길 가치가 있는 것들로 옮겨 놓아야만 한다. 소득과 상품은 원하는 다른 것을 얻기 위한 도구라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필요한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원하는 다른 것을 할 수 잇기 때문이다. 상품이나 소득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우리가 소득을 필요로하는 이유는 그것이 주로 좋은 삶, 즉 우리가 소중히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는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아마티아센, 1995년 유엔아동기금의 이노센티 강연에서>

- 지금 그들이 원하는 평화는 우리에게는 언제나 전쟁이었다. 토지아 상업, 제조업, 그리고 금융업의 훌륭한 주인들께서는 인디오들이 도시에 굴러 들어와서 죽음으로써 여태까지는 수입 상품을 쌌던 포장 쓰레기로만 어지럽혀졌던 거리를 더럽힐 것이라는 사실에 심기가 불편하시다. 그들은 인디오들이 선량한 사람들이나 관광객들의 눈에 띄지 말고, 여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산골짜기에서 조용히 죽어 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제 더는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이다. 소수의 부자가 다수의 가난 위에 형성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는 편안하게 살았던 사람들도 좋든 싫든 우리와 운명을 같이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이 나라가 그 원주민들에게 가해 온 커다란 역사적인 과오를 바로잡기 위해 마음의 눈을 뜨고 무엇이든 할 기회를 가졌었지만, 인디오들을 인류학적인 연구 대상이나, 관광객들의 호기심의 대상, 쥬라기 공원의 한 부분 이상으로는 여기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원주민들은 이제 이들을 쓰레기 취급하는 NAFTA의 등장과 함께 사라지게 되었다. 산속에 사는 사람들의 죽음은 그들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므로

- 대부분의 이주 노동자들은 한 해 한해 계속해서 착취나 마찬가지인 계약을 맺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간혹 일부 비평가들이 이런 노예와 같은 상황을 비난했다. 라디노들은 이를 즉각 부정한다. 그들이 맞다. (헌법에 금지되어 있는)노예제도는 없다. 그 대신 매년 재계약되는 부채 노예제도가 있을 뿐이다. 

- 우리는 자원이 부족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소리를 자주 듣지만, 객관적인 수치는 그 반대의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는 전례없이 큰 번영을 누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만일 치아파스가 세상에 들려줄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의 자원이 좀 더 고르게 나누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4장> 집집마다 전염병이? ; 러시아의 교도소에 재창궐하는 결핵

- 누가 감옥에 가게 될 가능성이 큰지, 감옥에서는 누가 감염되는지, 그리고 누가 치료를 늦게 받거나 부적절한 치료를 받게 되는지를 결정하는 중심에 구조적인 폭력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보여 줄 것이다.

- 결핵을 징벌로써 걸리게 하는것과 마찬가지인 현재의 상황을 멈출 유일한 방법은 모든 수감자에게 신속하고 효율적인 치료를 제공하는 수밖에 없다.

- "건강의 동반자"가 아이티나 페루에서 벌인 활동은 아주 가난한 지역에서도 다제내성 결핵을 성공적으로 치료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치료 약물이 비용 효율적이기에는 지나치게 비싸다는, 늘 반복되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특허 기간도 만료된 이 약들이 왜 그렇게 비싼지에 대한 제대로 된 조사도 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이런식으로 비용 효율성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불평등을 관리하는 (그리고 영속시키는) 중요한 수단의 하나가 되고 있다.
- 일자리 보장이 사라지자, 경범죄가 증가했다. 가난한 사람을 감금하는 것은 책에 기록된 가장 오래된 방편 중의 하나로, 사회학자인 로이 와캉은 이를 '경찰과 교도소를 이용한 빈곤의 관리'라고 불렀다.

- 부패와 민주화의 불행한 조합은 사회 경제적 권리를 극심하게 침해하는 길을 활짝 열어놓았다. 사회 경제적 권리를 중시하던 소비에트 시절의 전통은 사회적 재난에 의해 괴멸되어 버렸다.

- 전염병이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예산을 삭감하는 것은 집에 불이 났는데 갑자기 물을 아끼기 시작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이라고 하겠다.

- 잘못된 비용 효율성 개념을 바탕으로 보편적인 결핵 치료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다제내성 결핵이 멀리 떨어져 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질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이 병은 전염병이고, 공기를 통해 전염된다. 일부 환자들만 치료하는 것이 단기적으로는 경비가 더 적게 드는 것처럼 보이잠 장기적으로 보면 모두에게 재앙과 같은 결과를 가져 올 것이다.



인권에 대한 한 의사의 생각

   - 인권에 대한 논의는 생존권에서 시작해야 하는데, 이는 가난한 사람의 권리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혼 소브리노, '해방의 영성'>

- 해방신학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이것은 가난한 자들의 고통과 어떤 관계가 있으며, 그 고통을 경감시키는 데 어떤 영향을 주는가? 따라서 다른 대부분의 사회 분석들과는 달리, 해방신학의 주된 관심은 가난한 자ㅡㄹ에 대한 섬김이라는 주제로 연결되낟.

- 의사들도 누가 왜 아프게 되는지, 누가 어떻게 해서 치료를 받을 수 있는지를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 이론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과 그것에 바탕을 둔 여러 전망들은 의료인들이 현재 빠져 있는 긍지, 즉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의료를 제공하기보다는 돈을 낼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우리의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는 길도 제공해 줄 것이다.

- '시장의 힘'이 현대 의학을 좌지우지하도록 방치한다면 이 반갑지 않은 흐름은 의료를 행하는 것 자체가 곧 인권을 침해하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계속될 것이다.


<5장> 건강, 치유, 그리고 사회정의 ;해방신학의 가르침

- 고속도로나 샛길, 공장 지대나 빈민촌, 농장이나 탄광에 찾아가야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을 내 이웃이라고 정의한다면 내가 속하는 세계가 바뀔 것이다. 이것이 '가난한 자들을 고려하는 선택'이 가져오는 변화다. 성경에 가난한 자들이 우리의 이웃이라 되어 있으므로....
 
그런데 가난한 사람은 피할 수 없는 운명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정치와 무관하게 생겨난 것이 아니며,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존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체계의 산물이며, 따라서 우리는 이들에 대해 책임이 있다. 그들은 우리가 만든 사회와 문화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프로레타리아이며, 노동의 대가를 빼앗기고 인격마저 박탈당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의 가난은 자비로운 구호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어떤 상태가 아니라, 우리더러 새로운 사회질서를 세우라고 하는 요구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역사 속의 가난한 자들의 힘'>

-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에 더 잘 맞는 구조적인 분석은 일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소리내어 말하고, 그 새로운 틀 안에서 인권을 어떻게 보호해야 할 것인지를 설명하도록 이끌었다.
이런 변화는 단순히 말로만 끝나지 않는다. 이 대안적인 언어는 사실상 존재하지도 않는 평등을 누리고 있다고 전제하는 방임적인 자유주의 원칙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제시한다. 이 새로운 원칙은 또한 인권을 지키는 데 있어서 무엇이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인지를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는데, 그 중요한 문제란 바로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곤궁과 박탈, 라틴 아메리카의 삶과 사회의 갈등 양상,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보호해야 할 성서상의 근거 등을 말한다.                          <구티에레스>

- 악이라는 것이 권력을 쥐고 횡포를 부리는 개인들의 마음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 자체에도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세계를 바꾸려면 그 체제를 움직이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사회구조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포함한다.

- 20세기 말의 인류가 처한 상황의 면면에는 억압이라는 하나의 공통된 요소가 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굶주림을 비롯해 여러가지 고통을 받고 있는 현실은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로부터 억압을 받기 때문에 생겨난다. 이렇게 잘 드러나 있는 문제를 앞에 두고도 그 해법을 찾아내지 못하는 국제기구들의 무능함의 근저에는 타인을 억압해서 이익을 취하는
자들의 욕심이 자리하고 있다. 각각의 문제에는 도덕적 불감증과 정치력의 부재와 대처 능력의 부족이 중첩되어 있다. 
만약 문제의 본질이 이해관계를 둘러싼 갈등이라면,  그 갈등을 해결할 에너지는 억압받는 자들 자신으로부터 나와야만 한다. 

- 어떤 이들은 우리가 이전부터 준비되어 있었으면서 왜 지금 시작하기로 결정했는지 묻는다.
이전에도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변화를 이끌어 내려고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 우리의 대답이다. 최근 10년간 15만 명 이상의 우리 형제 자매가 치료할 수 있는 병으로 죽어 갔다.
연방정부, 주정부, 지방 정부의 경제 사회 정책에는 우리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해결 방안은 전혀 없고 선거철에 적선하듯이 내어 주는 대책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빵부스러기 같은 선심은 우리의 문제를 아주 잠시 완화시킬 뿐, 곧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 위에 다시 드리워졌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이렇게 의미 없이 죽을 수는 없다, 차라리 변화를 위해 싸우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만약 우리가 지금 죽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부끄럽지 않게, 우리의 선조들처럼 위엄있게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사파티스타>

- 큰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동료 인간들의 기도와 염려에 대해 늘 고맙게 생각한다.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실질적인 도움이 없는 마음만의 연대는 무척 공허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 상품화된 의료는 건강을 좋은 제품가 서비스를 구매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바람직한 상태라고 보는 것에서 출발한다.

- 자신들의 '선함'을 계속 드러내려면 억압자들은  불의를 영속시켜야 한다. 불의한 사회질서는 이런 '선함'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며, 그런 질서는 죽음과 절망과 가난에 의해 유지된다. 참된 선함은 이렇게 잘못된 자선을 필요하게 만드는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프레이리>

- 자선이 다시 증가하는 것은 평등이 후퇴하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대응하는데 우리 사회가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증상이자 그 원인이다. 그것은 빈곤을 (최소한 일부라도) 제거하겠다는 희망을 버림으로써 나타나는 증상이며, '위대한 사회'에서 표방되었던 목표뿐만 아니라 그 방법으로부터도 후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고, 문제를 관리하는 방향으로  (즉, 예방보다는 피해 복구로) 돌아섰다는 것을 드러내는 증상이다. 한발 더 나아가서, 논쟁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자선의증가는 우리 사회가 가난에 대한 싸움에 실패하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   <자넷 포펜딕 '친절의 증가와 정의의 감소 사이의 관계 '> 


<6장> 선지자들의 경고 ;시장 중심 의료에 대한 비판

-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할 때마다 벌어지는 '결과의 차이'때문에 의학이 발달할수록 건강 격차는 더욱 벌어지는 역설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 방금 당신과 이야기하던 의사 말입니다. 그는 장사꾼인가요? 보수를 받아먹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병자들을 치료하는 사람인가요?    <플라톤의 공화국>

- 세계화된 시장경제는 모든 배들을 끌어올릴 것이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부의 증가는 대신에 과잉과 천박함을 더 견고하게 자리 잡게 만들었다. 우리는 신문을 통해서 흉작이나 분쟁 소식을 접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깜짝 놀랄 정도로 비싼 사치품을 판다는 소식도 듣는다. 

- 자유 시장은 서비스와 치료가 불평등하게 분배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관심이 없다. 
돈을 낼 수 없는 환자들에 대한 치료를 거절한 사례는 과거에도  없지는 않았다. 그래도 자신의 건강문제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못한 책임을 환자 혼자서 고스란히 지게 되어 있는 자유 시장 체계만큼 치료의 거부가 정당하다고 인정 받은 적은 없었다........략...... 이 관점에서 보면 불평등은 불행한 것이지 불의한 것이 아니다. 그저 일부 계층은 자연과 사회의 로또에서 실패한 자들일 뿐이다. 사장 윤리의 본질이 이타주의를 배재하지는 않지만, 서로 도와야 한다는 윤리적인 의무를 부과하지도 않는다.                                             <펠레그리노>

- 자유 시장에는 돈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보험에 들지 못한 사람들, 보험에 들 수 없는 사람들)이 설 자리가 없다. 만성질환을 앓는 환자, 장애인, 병자, 노인, 정서장애 환자라는 사실이 이제는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 주어야 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반대로 이들은 더 높은 보험금, 더 많은 수수료를 내야 하거나, 보험 가입을 거절당한다.  이 환자와 가족들에게 설명하고 상담하고 격려하고 교육하는 데 추가로 시간을 할애하는 것을 이제 더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일들을 하려면 이들이 지불하는 요금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 누가 새로운 약을 구할 수 있을 것인지를 결정할 권한을 우리가 시장의 힘에 양도했기 때문에, 도움을 가장 필요로하는 사람들은 질병의 창궐에 대처하는 전략을 개발하는 사람들의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는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 불평등은 의사들이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들 하는데, 불평등과 양질의 의료를 양립시키는 일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에이즈와 결핵 치료제를 제공하고자 하는 연방 정부의 임시방편적인 대책조차도 정치권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곤 하는데, 그 정치인들은 자기 자신과 가족들은 그런 제도를 필요로 할 날이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라는 오만에 가까운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 우리 모두가 특히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현대 기술의 결실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보건 의료의 '개혁'이 진행될 수록 기술은 돈을 지불할 수 있는 자들에게만 제공되게끔 바뀌어 가고 있다. 
 
우리는 지금 선택의 교차로 앞에 서 있다. 의료를 사고파는 상품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기본적인 권리로 생각할 수도 있다. 동시에 두가지 모두에 해당된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무리다.

- 의료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의사나 의료기관의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인가? 본질적으로 따졌을 때, 환자들과 그들이 겪는 고통이 의사와, 병원과, 그 투자자들을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의사와 그들이 종사하는 의약 산업 전체가 환자들을 치료하고 인간의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 존재하는가?            
                                           <리처드 건더먼  '의료와 부의 추구'>

- 오늘날은 참으로 위험한 시가다. '비용 효율성'이라는 미명하에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할 예산이 삭감되고 있는데, 이들은 안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다 아플 가능성이 더 큰 사람들이다.

우리는 치유의 기회를 놓치고 있다.  재정이 부족하다는 소리만을 좇아서 보건의 안전망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편익을 핑계로 인간적이고 따뜻한 마음을 잃어가고 있다.

- 비용 효율성은 전체적인 보건 상태를 호전시키는 데에는 적절하지만, 보건상의 두 번째 목표인 불평등을 줄이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평균보다 나쁜 건강 상태에 있는 인구 집단에서는 보건 사업의 효과가 덜 나타날 수 도 있고, 이들에게 접근해서 치료하는 데 비용이 더 들 수도 있다.
   따라서 분배를 염두에 두고자 한다면, 이 척도를 위해서 전체적인 보건의 향상을 약간 희생할 용의가 있어야 한다.
                                                   <세계 보건 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 인류가 존재한 이래로 아픈 사람들은 언제나 이러저러한 성향의 치료자들의 도움을 받아왔다. 인간의역사에는 훌륭한 치료자도 있었고, 돌팔이도 있었다. 그런데 의학이 지금처럼 과학과 기술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었던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이것이 20세기의 발전이었다면, 이제 우리는 21세기의 선택을 해야 하낟.

치료자들은 의료를 인간의 기본권으로 만들고자 하는 싸움에서 어느편에 설 것인가? 가난한  병자들의 고통은  이 날카로운 질문을 우리 앞에 던지고 있다.


<7장> 잔인하고 유례에는 형벌 ;약제내성 결핵

- 징벌에 포함되어서는 안 될 질병과 죽음이 감금 때문에 증가하고 있는 현실을 고발하고, 또한 이런 상황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한 현상황이 발생시킬수 있는 위험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 교도소는 미국내의 가난한 이들을 보이지 않게 숨기는 다른 모든 산업들과 마찬가지로 전도가 유망한 산업이다.
                               <로이 와캉  '빈자의 감옥'>

-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협력과 선의가 필요하며, 또한 재원이 필요하다.

- 무엇보다도, 우리는 포기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는 가장 큰 문제는 체념이라는 결론에 도달 했다.
바로 이런 체념 때문에 출판물이나 보건 운동 단체의 주장에서 교도소의 약제내성 결핵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청사진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대신에 다제내성 결핵을 제대로 치료하자는 요구는 '이상주의적'이거나, '비현실적'이거나, '그림의 떡'이거나, '비용효율적이지 못하다'고 기각되어 버리곤 한다.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인 결핵 치료가 '이상주의적'이든 아니든, 이 방법 이외에는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것이 갈 수록 명백해 지고 있다.

- 세계 보건 기구의 정관은 "국가간에 건강 증진 및 질병, 특히 전염병 통제 수준의 불균등한 발전은 모두에게 위협이 된다." 고 경고하고 있다. 이런 이중 기주을 강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전할 좋은 소식 하나는, 전염성 질환이 통제되지 않는 한, 정말로 안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이제는 부유한 사람들도 깨달아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8장> 새로운 과제 ;세계화 시대의 사회적 권리와 의료윤리

- 이 시대의 가난한 환자들 앞에 놓인 비극과 맞서지 못하는 윤리는 부도덕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

- 1년동안 약 6백만 명이 결핵, 말라리아, 에이즈로 죽을 것이 예상되는데, 치료 가능한 이 세 가지 질병은 거의 전적으로 현대적인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거두어 간다. 이 죽음은 구조적인 폭력을 반영하는 것이며, 따라서 인권사회의 중심의제가 되어야만 한다.

- 제가 윤리를 거스를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저는 그분의 바지가 좌우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퍼뜨렸다고 해서 죄인으로 몰릴 생각만 해도 두려운 걸요. 그래서 모든 책임으로부터 빠져나갈 대비책을 벌써 준비해 두었지요..........이제 윤리에 대한 반란죄로 우리 모두가 경찰에 에워 싸여도 죄인을 찾아내기가, 전적으로 책임질 자를 찾아내기가 아주 어려울 겁니다.                                     <존 카푸토  '윤리에 반하여'>

- 제 3세계에서의 연구는 지원금도 더 많고, 점점 더 엄격해지는 국내 규제를 피할 수 있어서 상대적으로 더 매력적이다. 외국에서도 최서한 국내에서만큼 피실험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기는 하지만, 그 조항들은 지켜지지 않을 때가 많다. 어떤 실험이 그것을 추진하는 나라에서는 승인받을 수 없기 때문에 제 3세계에서 시행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임상실험은 아주 큰 사업이 되고 있는데, 그 대부분이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성공을 ㅟ해서는 장애물을 최소화 하고 가능한 빨리 연구를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           <마르시아 안젤>

- 부유한 나라에서 개발된 윤리 규정은 부유한 대학이 가난한 나라에서 연구를 수행하려고 하면 무용지물이 된다는 현실이 가장 큰 문제다. 따라서 가난한 지역에 '적합한'(즉, 덜 엄격한) 규정을 개발하려는 시도가 뒤따른다. 이렇게 수정된 규정은 '현명하다'거나 '합리적'이거나 '현실적' 이라는 평을 듣는다.

- 전문가가 되고자 하는 주요 동기 가운데 하나가 자율성을 원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데, 자율성은 윤리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 전문 영역에 도덕적 의무를 부과한다.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현재 '전문가'의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 애쓰는 집단들을 떠올려 보기만 하면 된다. 그들이 우선 착수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그 회원들이 준수할 윤리 규정을 만들어 공표하는 일이다.     <솔과 배스포드>

- 치료를 받는 것이 인간의 기본권이라면, 그런 권리를 가지는 인간은 누구인가?

- 환자들이 직면하는 난제들을 다루는 학문인 의료윤리가 누가, 왜 아프게 되는지, 그리고 누가, 어떻게 해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는지에 대해 보다 넓은 시각을 제공할 수 있을까?

- 나는 가난한 병자들이 여러가지 의미에서 가장 준엄하고 충성스러운 비판자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충성스러운가 하면, 우리가 그들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 병원이나 진료소를 계속 찾아오기 때문이다.

듣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그들이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 그 어떤 전문가 집단도 의료인들만큼 병에 걸려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더 자주, 더 가깝게 다가가지 못한다. 이런 큰 특권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의료인과 병에 걸려 고통바든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사업상의 계약이 아니다.

- 의학이 '천직'이라는 예우를 받으려거든 윤리 강령을 만든 전문직 스스로 가난한 병자들에 대한 치료자로서의 특별한 의무를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고 있다.

- 모든 사람이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드는 궤변에 우리는 얼마나 저항해 보았는가?

미국에서 이루어지는 윤리 논쟁의 일각에 숨겨진 전제는 매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엄청난 부를 어떻게 잘 관리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 "의사 및 의료인들은 환자와 주민들의 입장을 지지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이익을 위해 제도를 남용함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불이익을 주어서는 안된다. "  <타비스톡 선언의 초안>

이 초안을 쓴 사란들을 부유한 국가의 의사들이 사회보장제도를 남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와 같이 권고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아이티나 우간다, 러시아, 할렘가가 우리와 같은 세상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면, 가난과 질병이 만연한 이들 지역에서 임상 실험을 실시하는 것 역시 '제도를 남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문제의 그 제도란 우리 눈앞에 점차 모습이 드러나고 있는 전 지구적인 관계망을 의미한다.
   실험의 내용은 대부분 그 연구비를 대는 나라 안에서는 윤리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들이다. 연구소 심사위원회가 그 실험은 승인한 것은 아무런 치료도 하지 않는 것이 실험대상자들이 살고 죽는 가난한 사회의 지역 치료 기준이기 때문이다.

- 인권이라는 개념이 때로는 만병통치약처럼 남용되기도 하지만, 인권을 본래 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다.
인권관련 주요 문건들의 진정한 가치는 그것이 인권침해를 당할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할 때에만 드러날 것이다.

- 세계 인권 선언문의 정당한 수혜자는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이다. 개인주의와 풍요와 상대주의가 만연한 우리 시대에 이 말이 아무리 불편하다 하더라도 말이다.

-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질병이라는 고통의 대부분을 감내하고 있는 이때, 우리는 다시 한번 다수의 인류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모든 사람"이라는 말이 진정으로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질 기회 앞에 서 있다.


<9장> 보건과 인권 다시 세우기 ;방향의 전환을 위하여

- 세계 시장 경제가 전통 사회들과 그 도덕 체계를 해체하고, 세계를 구석구석까지 단일한 경제트로 끌어들임에 따라서, 인권은 세계의 신중산층이 새로운 세계 질서 안에서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는 우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세속적인 교리로 떠올랐다.                 <케네스 앤더슨 '인권감시' 전 회원>

- 만약 이것이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 세계화 시대에 들어선 이후, 공중보건은 효율성이라는 미명 아래 형평성 면에서 후퇴를 거듭해 왔는데, 공교롭게도 빈곤 계층은 세계화의 결과로 이런 차별화된 치료에 반발할 만큼의 정보를 입수할 수 있게 되었따.

- 건강 문제 이외에도 우리에게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병세는 호전되었지만 집세를 마련해야 한다. 일거리를 찾기도 어렵다.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야 한다. 우리는 자식을 키울 방도를 찾지 못하는비참한 현실과 매일 마주하고 있다. 아이티의 모든 부모들의 가장 큰 고민은 아이들을 제대로 먹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비극이 다른 나라에도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모든 상황을 생각하다 보면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모든 인간은 다 같은 인간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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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감염이 되어 있는 우리도 예방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잇다. 그러나 예방만으로는 이미 병에 걸린 사람들을 구할 수 없다. 병에 걸리면 누구나 치료를 받을 수 있어야 함에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병원도 의사도 간호사도 치료도,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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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권은 곧 생존권이다. 누구에게나 살 권리가 있다. 만약 우리가 이런 비참한 정도가 아니라 견딜만한 가난 속에 살고 있었더라면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지금과 같은 곤경에 처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HIV에 감염된 아이티인들이 발표한 성명서>

- 인권담론이 때로는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어서 구스타보 그티에레스가 지적하듯이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에 대해 이야기 하려면 '별도의 언어'가 필요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그는 인권에 관한 '자유주의적 이론'에서 "우리 사회가 (사실상 존재하지도 않는) 평등을 누리고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했다.

- 고문을 금지하는 규범이 존재한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없다. 그 규법을 부정하는 국가는 없으며, 실제로 국내법과 국제 사법 체계 안에서 널리 받아 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제 엠네스티의 보고서에 나타나는 것처럼, 대다수의 국가들이 고문을 체계적으로 자행하고 있다.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세태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우리는 현존하는 국제법으로 고문을 실질적으로 금지할 방법이 없다고 결론 내려야하지 않을까?   <로절린 히긴스>

- 국가 내부의 혹은 국가 간의 불평등은 의학과 과학 진보의 열매가 어떤 이들에게는 넘쳐 나고 다른 이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불평등의 규모는 엄청나며, 그 추세 역시 좋지 않다. 

- 불평등이 질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이제는 알려져 있지만,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정부는 건강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반면, 나머지 국가들은 대부분 그런 불평등에 대처할 능력이 없다. 

- 권력과 긴밀하게 연결된 "인권사회"의 성명이나 활동에는 겸손한 자세가 부족하고, 위선이 너무나 많이 베어난다.

  서구가 타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이전보다 현저하게 자주, 그리고 더 변덕스럽게 개입함에 따라서 서구 사회가 제시하는 권리기준의 정당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인권은 갈수록 지난날 거만했던 식민지 시대의 무자비하고 기만적인 태도와 똑같은 도덕적 제국주의를 나타내는 언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략........................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나라들이 한쪽으로는 인도네시아나 터키가 자국의 반정부 민간인들을 억압하는데 사용하는 무기와 수송 장비들을 제공하면서, 다른 쪽으로는 그 나라의 인권 상황을 비난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가치관이 이익추구를 실질적으로 제어하지 못한다면 영욱 노동당 정부가 스스로 내건 목표인 '윤리적인 대외정책'은 모순에 빠질 것이다.                                     <정치와 맹목적 숭배의 대상으로서의 인권>

- 심각한 가난을 앞에 두고 스슷로를 실용주의자라 하면서 윤리 기준을 완화시키려고 하는 자들에 대한 더욱 준엄한 질책으로 해방신학의 목소리를 다시 한번 들어보자.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더 우선적으로 고려할 것을 요구한다.

-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해서, 다음에 목표를 낮추어 잡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관행이 되어 버렸다. 그보다는 새로운 접근법을 모색하고, 더 효과적인 개입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 우리느느 가장 기본적인 교육조차 받지 못했고, 그래서 사람들은 우리를 총알받이로 이요하고 우리의 부를 약탈해 갈 수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가진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 우리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머리 위의 지붕도, 한 조각의 땅도, 일자리도, 의료도, 식량도, 교육도 없다는 사실을 외면했다. 우리는 민주적으로 자유롭게 우리의 정치적 대표자를 뽑을 수도 없고, 외세로부터 독립할 수도 없고, 우리 자신과 우리 아이들을 위한 평화와 정의를 누릴 수도 없다. 
                                                                     <사파티스타 반군 지도자들의 성명서>

- 멕시코 정부의 보건 및 여타 서비스는 좋게 표현하자면 정부의 대게릴라 작전보다 우선순위가 떨어진다. 나쁘게 말하면 이런 서비스는 그  자체가 억압의 한 방편으로서, 지지자들에게는 포상이 되는 반면에 반대자들에게는 징벌을 가하면서 사기를 저하시키는 데 이용된다. 어느쪽이 되었든, 자치 지구에 제공되는 정부의 본건 의료 시책은 차별적이고, 정치적인 분열을 조장하며, 그 지역 주민이 실질적인 의료 수요에 전혀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인권을 위한 의사회>

- 우리의 사명, 우리의 충성은 일차적으로 가난한 사람들과 약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런 사명이 얼마나 독특한 것인지를 알아보려면 세계보건기구를 비롯해서 유엔과 관련된 국제기구들이 그 본질상 정부들과 일하게끔 되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라.

- 연대 의식에 물질적인 차원이 지원이 보태진 실질적인 연대는 이 사회의 벼랑 끝에 살고 또 죽어가는 사람들과 지역사회들의 요청에 부응한다. 생각을 넘어서서 행동을 하는 것은 물론 더 큰 위험을 동반하는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주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이상과 철저한 분석을 연결시키는 일은 가능한 일이다.

- 미국처럼 부유한 나라에서 인권 운동을 더 큰 파이 조각을 얻기 위한 씁쓸한 경쟁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은, 결국 우리가 누리는 풍요의 결과로 고통받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분석의 대상에서 누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예를 들어서 다국적 기업에서 성별에 따른 유리천정을 깨는 것)과 기본적인 의료 등의 필수 재화를 얻기 위한 투쟁은 구분을 해야한다. 특히, 마지못해 극소수의 여성과 소수지단 출신에게 임원 자리를 내어 준 바로 그 기업들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불평등을 더  크게 벌려놓고 있다면 말이다. 
    과거에 자신의 권익을 제데로 주장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이제 오히려 불평등을 더욱 조장하면서 권력과 부에 접근하고자 맹렬하게 도전하는 것을 사회정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까?

- 권리의 개념을 가능한 모든 것을 포괄할 정도로 확장시키다 보면 큰 위해를 끼치는 부당한 사건들이 사소한 불평의 홍수 속에 묻혀져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 주의깊은 분석을 해야만 그들의 주장에 확신을 가지고 반박할 수 있다.  우리는 인권 침해를 '연구만'해서도 안되지만, 연구하기를 그쳐서도 안 된다. 

- 루돌프 피르호는 의사들을 '가난한 사람들의 타고난 대변인' 이라고 했다.
 '보건의 시각'은 독특한 접근법을 통해 인권 담론의 폭을 넓힐 수 있다. 

- 서비스의 제공을 새로운 의제로 둔다.

- 인권침해에 대응하고자 더 많은 인권 관련법을 제정하는 것은 별의미가 없는데, 그 이유는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이 이미 구속력이 없다는 것으로 드러난 그 법들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략...................
아이티인들이 말하듯이 "법은 종이로 만들어졌고, 무기는 쇠로 만들어졌다". 법만으로는 이런 극심한 고통을 덜어 줄 수가 없다. 

- 고통받는 사람들은 나보다도 훨씬 더 날카로운 비판을 하는데, 듣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연구 센터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통에 대해 새로 연구하라고 하지 않는다. 이런 사실은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해온 전총적인 시도들(저널, 책, 논문, 코스, 회의, 연구)과는 다른 새로운 접근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 생명의학의 치료 기법이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널리 전달하는 능력은 오히려 그 이상 줄었다.

- 가장 열악한 조건 속에서 15년 간 일해 본 결과, 우리 단체는 어떤 조건에서나 가장 높은 수준의 의료를 제공하는 것은 어렵고 어쩌면 불가능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고자 계속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 최근 제 3세계에서 행해지는 에이즈 연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란은 질이 낮은 의료를 공식적인 정책 표준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사회 경제적 권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기준이 인권침해로 널리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보건과 인권 부문에서는 효율성이 정의를 누를 수 없다. 

- 아이티 과테말라 르완다에서 일어나는 인권침해가 부유한 세계에 사는 우리의 안락과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려면, 우리는 역사를 삭제해 버리고 모든 경계를 초월하는 권력의 병리 작용에 대해서 눈을 감은 채로 있어야 한다. 그런 허구를 영속시키기 위해서는 (순진함 때문이든, 무책임함 때문이든, 공모에 의한 것이든) 구조적인 폭력의 기원과 그 결과를 은폐하는 정직하지 못하고 탈사회화된 분석이 필요하다. 
   이 책에서 지금까지 주장한 것은 이제 건강권을 다른 인권만큼 진지하게 추구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인지하는 것은 실질적인 연대를 향해 나아가는, 즉 갈수록 가혹해지는 '새로운 세계 질서'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는 첫걸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후기 
    ; 불평등이 관리되는 시대의 인권

- 개발에 대한 평가는 부유한 자들이 더 부유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빈곤의 감소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나아질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전망없이는 미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가난한 자들에게 희망은 있는가?      <아마티아 센>

- 희생자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언어나 성별이나 정치적 성향도 아니고, 종교나 인종이나 부족도 아니다. 그들이 그들 모두가 공유하는 것은 가난하다는 것,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굴복하기를 거부했던 자들이라는 것이다. 권력의 병리 현상은 관련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는데 죽는 것은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다. 이런 범죄는 구조적인 폭력의 증상과 징후다. 우리의 안락을 위해 이런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을 조금이라도 용납한다면, 이는 우리 자신의 안락을 위해 이 범죄에 동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라틴아메리카는 20세기 마지막 20년간 가난이 심화되는 과정을 겪었고, 그 결과로 폭력의 온상이 되었다. 이 지역 18개국 가운데 13개국의 노동자들을 1998년에 1980년보다도 적은 최저임금을 받았다. 그럼에도 소비의 기대 수준은 내려가지 않았고, 도시 지역에서는 오히려 미국의 수준에 필적할 만큼 올라 갔다. ...... 그렇게 된 문화적인 과정은 모든 국가에서 대동소이 했다. 광고가 사회 깊숙이까지 파고들었고, 대중매체는 사람들의 기호를 갈수록 획일적으로 만들었고, 명품을 소비하는 것이 하나의 생활 양식이 되었따아. 첼레비전은 도처에, 심지어 도시의 가장 가난한 가정에도 보급되었으며, 이는 소비문화를 엄청나게 확산시켰다. 그 결과 원래 부족했던 소득 위에 도시 지역의 안락한 삶을 상징하는 제품들에 대한 욕구와 패션 브랜드를 통한 외적인 구별짓기의 욕망이 더해졌다. (브리세뇨 레온과 주빌라가 2002)

'성장을 통한 과정'과는 달리 '부양을 통한 발전'은 높은 경제성장을 통해서 작요하지 않는다. 이는 스리랑카, 개혁 이전의 중국, 코스타리카 인도의 케랄라 주 등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데, 이들 국가에서는 큰 경제 성장 없이도 사망률을 매우 빠르게 감소시킬 수 있었다. 이 방법은 일인당 실질소득의현격한 증가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며, 사망률은 낮추과 삶의 질을 높여주는 사회복지사업(특히 보건과 기본 교육)에 우선 순위를 둠으로써 이루어 진다. (Sen 1998)

'아래'를 향한 연구만큼이나 '위'를 향한 연구도 역방향의 '상식적인' 질문들을 던질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왜 어떤 사람들은 가난한 지를 묻는 대신에, 왜 다른 사람들은 그토록 부유한지 물을 수 잇을 것이다. 사회과학자가 미국의 부유층과 중산층이 축적되는 양상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 낼 수 있을 것인가? 선택의 여지가 '많아 보이는' 사람들이 저토록 완고하게 변화에 저항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인류학자들은 왜 영세 농민들은 변화하지 않는지를 묻는 대신에 자동차 산업은 왜 혁신하지 않는지, 왜 국방부와 대학은 더 창의적인 조직이 되지 못하는지를 묻지 않는 것일까?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자성해샤 할 것이다. 주요 기관과 관료적인 기구들의 보수적인 경향은 아마도 영세농미들의 보수적인 경향보다도 인류와 변화에 관한 이론에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Nader 1972)

쿠바가 미국에 골칫거리인 이유는 항상 같았다. 자신들이 잘 살 기회를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미국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ㅇ르 쿠바가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카스트로의 사상'을 통해서 계속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쿠바는 현재의 심각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어느나라보다도 더 높은 비율로 의사들을 해외에 파견하고, 미국을 난처하게 만들 정도의 보건 의료 제도를 상상 밖으로 유지 하고 있다. 이런 문제들과 미국의 역사에서 뿌리가 깊은 광신적인 경향 때문에 현재의 미국 정부는 신경질적으로 공격을 하고 있고, 또한 앞으로도 헛되이 계속할 것이다. (Chomsky 2000)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빵한조각이 생명이며
그것을 빼앗는 것은 살인이다
이웃의 살길을 막는 것은 그를 죽이는 것이며
일꾼에게서 임금을 갈취하는 것은 그의 피를 빨아먹는 것이다.  (집회서 34장 18-22절)

우리는 동냥이나 자비가 아니라 정의를 원합니다. 고정한 임금, 약간의 좋은 땅, 깨끗한 집, 정직한 학교, 효험이 있는 의약품, 식탁에 올릴 빵, 우리의 것을 존중받는 것ㅇ, 우리의 생각을 말하고 우리가 하는 말이 죽음이라는 희생 없이도 평화롭게 다른 이들의 말과 통할 것을 원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동안 계속 요구했던 것인데 아무도 우리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그런 이후에야 우리는 손에 무기를 들었고, 우리의 농기구를 투쟁의 도구로 바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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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평화는 평화가 아니라 죽음이자 멸시였고, 아픔이자 고통이었고, 치욕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전과 같은 평화는 더는 원하지 않습니다.       (사파티스타 반란군 부사령관 마르코스,  1994)

브라질 북동부 지역의 빈민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장기이식은 젊고, 가난하고, 아름다운 몸으로부터 늙고, 부유하고, 추한 몸으로, 그리고 남반구의 가난한 국가로부터 북반구의 부유한 국가의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불평등이 압도하는 세계에서는 장기도 여러 상품 가운데 하나가 되어 버린다.   (생명을 훔치다:세계화와 장기 절취에 대한 소문)

필요에 의해 개발되는 약은 거의 없다....가난한 사람들이 걸리는 질병의 치료제의 연구개발 문제는 시장원리로는 해결할 수가 없다.     

관리 의료의 지지자들에게는 의료가 자동차 조립이나 컴퓨터 칩을 제조하는 것과 그다지 차이가 없다.  이 모델은 1차 의료와 예방에 중점을 두며 관리 의료의 사고 방식에 의하면 HMO는 중한 질병에 대해서는 양질의 진료를 제공할 필요없이 (즉, 진짜 아픈 사람을 치료하지 않고서도) 높은 이윤을 거두어 들일 수 있다 .         (Anders 1996)

임상 실험은 입증된 최고의 치료가 보장되는 가운데 행해져야 한다. ...가난한 나라에 별도의 윤리적인 잣대를 적용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경제적인 요인이지, 윤리나 과학에 바탕을 둔 결정이 아니다. 따라서 그런 임상실험은 허가되어서는 안된다. (Greco 2000)

빈약한 인프라 때문에 가난한 국가의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뻔한 주장을 비난하면서 응구옌은 "빈약한 시설을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마치 예산 삭감으로 중환자실이 폐쇄도었다고 해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심폐 소생술으 행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응수했다.  

차관을 받는다면 결국 나라을 빚의 구렁텅이에 더 깊이 빠뜨리게 도리 것이다. 우리가 항레트로바이러스제를 구하고자 하는 이유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함인데, 차관은 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나미비아의 종신 보건부 장관인 칼룸비 샹굴라)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이 제약회사들은 개발도상국이 항레트로바이러스제 등의 복제약을 생산하는 것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 회사들은 경쟁에 내몰리면 자신들이 투자한 연구개발 비용을 회수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수익과 지출을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대부분의 미국 제약회사들이 마케팅 광고 관리비에 연구개발비보다도 더 많은 돈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Pollack and O'Rourke 2001)

최근에 신약의 연구개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약값을 높게 책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연구들이 발표되었따. 1989년부터 2000년까지 12년동안 미국FDA가 승인한 1035종의 신약을 본석해 본 결과, 그중 단 15퍼선트만이 혁신적인 - 새로운 활성 물질을 포함하면서 임상효과가 월등하게 개선되- 신약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인가된 나머지 약들은 기존의 약을 조금 개선한 것에 불과했고, 이 경우에는 연구개발 비용이 많이 들지 않으므로 투자 대비 수익률이 더 높았다.
(National Institute for Health Care Management 2002)

유럽이나 미국 일본에 본부를 둔 초국적 제약회사들은 오늘날 세계의 최하계층 10억명이 주로 걸리고 대부분의 때이른 죽음을 초래하는 전염성 질환은 무시한 채, 비교적 잘 사는 나라에서 문제가 되는 질병들에 대한 의약품의 연구개발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Pharmaceutical Research and Manufactures of America 2002)

내가 생각하는 의료를 정의하자면, 일반적으로, 아픈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질병의 경과를 완화시키며, 그리고 병세가 이미 깊어져서 의학의 힘이 미치지 않는 자들에게는 치료를 중지하는 것이다. (히포크라테스)


posted by Dr.Hannah Son
:
독서 2010. 6. 2. 19:35

홀로코스트를 소재로한 서적들은 마음을 조금은 피로하게 하였기에 사놓고도 근 2년을 방구석에서 굴렸던 책이다.
인턴합격 후 새로운 병원생활에 대한 기대감과 과연 그 과정을 잘 해 나갈 것인가하는 불안감이 함께 머릿속을 떠다니던 시절..
이 책을 읽었다. 그리고 힘을 얻었다.

이책의 원제는 Man's searching for meaning 부제는 An introduction to Logotherapy 이다.
원제 그대로 해석을 했더라면 비록 책은 좀 덜 팔렸을지 몰라도 훨씬 더 이책의 진정성에 가까웠을 텐데..
수용소의 경험담이 아니다.
그것은 재료일뿐..
사람이 왜 죽지 않고 살아가는지에 대한 고찰이다.
그에대한 예를 들기위해, 사는 것 보다 죽는 것이 더 행복해보이는 수용소에서 사람들이 생존한 이유와 방식을 예로 든 것일뿐..
잔인한 묘사도 잔학에 대한 고발도 없다.
다만 사람의 본성에 대한 담담한 고백과 성찰이 있을뿐..
회피할 핑계 또는 잘해야할 외부적 동기를 찾던 내게 차분히 너 자신을 보고..너의 머리로 생각하고..너의 손발로 행동할 것을 말해주었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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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공을 목표로 삼지 말라. 성공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표적으로 하면 할수록 그것으로부터 더욱 더 멀어질 뿐이다.
성공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찾을 수 잇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다.
그것에 무관심함으로써 저절로 찾아오도록 해야 한다. 나는 여러분이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이 원하는 대로 확실하게 행동할 것을 권한다.

- 산다는 것은 곧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시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삶에 어떤 목적이 있다면 시련과 죽음에도 반드시 목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는 누구도 그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줄 수는 없다. 각자가 스스로 알아서 이것을 찾아야 하며, 그 해답이 요구하는 책임도 받아들여야한다.


강제 수용소에서의 체험

-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희생자 명단에서 자기 자신의 이름이나 친구의 이름을 지우는 것이다. 한 사람을 구하려면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몇 년 동안 끌려다니다 보면 결국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만 살아남게 마련이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잔혹한 폭력과 도둑질은 물론 심지어는 친구까지도 팔아넘겼다. 

운이 아주 좋아서였든 아니면 기적이었든 살아 돌아온 우리들은 알고 있다. 
우리 중에서 정말로 괜찮은 사람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 사람들은 담배를 피울 수 없었는데,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살아갈 의욕을 잃었거나 아니면 자기에게 남은 생의 마지막 순간을 그저 '즐기려는'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는 경우였다. 따라서 어느 날 동료가 자기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가 자신을 지탱해나갈 힘을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일단 그 믿음을 잃고 나면 살고자 하는 의지가 다시 생기기는 힘들었다. 

1. 집행유예망상
;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언젠가는 자기에게 집행유예가 내려질 것이며, 만사가 잘 풀릴 것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곧 눈앞에 펼쳐질 장명 뒤에 어떤 의미가 숨어 있는지를 몰랐다. 

2. 무너진 환상, 그리고 충격..그 후에 찾아오는 냉담한 궁금증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묻지 말아 주십시오."

3. 절망이 오히려 자살을 보류하게 만든다.
 ; 오히려 가스실이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살을 보류하게 만들었다. 

4.  혐오감
; 이 세상에는 사람의 이성을 잃게 만드는 일이 있는가 하면 더 이상 잃을 이성이 없게 만드는 일도 있다. <레싱>

5. 무감각... 그러나 무감각한 죄수도 분노할 때가 있다.
; 바로 그순간 피가 머리로 솟구쳤다. 어떤 사람으로부터 그가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내 인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6. 퇴행
; 현실이 불확실하면 오로지 한가지 과제에 모든 노력과 감정이 모아지게 된다. 즉 내자신의 생명과 친구의 생명을 보존하겠다는 과제이다. ....그와 같은 긴장상태는 살아남아야한다는 과제에 끊임없이 집중해야 할 필요성과 결합되어 수감자들의 정신세계를 원시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략)......
우리 중에서 정신력이 가장 강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도 맛있는 음식을 다시 먹게 될 그날은 그리고 있었다. 단지 맛있는 음식 자체 때문이 아니었다. 그때가 되면 먹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었던 인간이하의 상황이 마침내 끝난다는 것을 의미하게 때문이었다.

7. 메마른 정서

- 극단적으로 소외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주어진 고통을 올바르게 명예롭게 견디는 것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때, 사람은 그가 간직하고 있던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

- 유머는 자기 보존을 위한 투쟁에 필요한 또 다른 무기 였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유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과 초연함을 가져다준다. 

- 유머감각을 키우고 사물을 유머러스하게 보기 위한 시도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기술을 배우면서 터득한 하나의 요령이다. 

- 인간의 고통은 기체의 이동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일정한 양의 기체를 빈방에 들여보내면 그 방이 아무리 큰 방이라도 기체가 아주 고르게 방 전체를 완전히 채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통도 그 고통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인간의 영혼과 의식을 완전하게 채운다. 
따라서 고통의 크기는 완전히 상대적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그는 수프를 퍼주면서 그릇을 내민 사람을 쳐다보지 않는 유일한 요리사 였다. 자기 친구나 고향 사람에게는 몇알 안 되는 감자를 주고, 다른 사람에게는 위에서 살짝 걷어낸 희멀건 국물만 주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수프를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자기가 아는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우선시 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 자기 친구에게 호의를 베풀었다고 해서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지겠는가? 그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때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정말로 정직하게 그런 일을 하지 않을 확신이 서지 않는 한 그런 사람들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인간의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이 지닌 가치가 더 이상 인정을 받지 못하는 세계, 인간의 의지를 박탈하고, 그를 단지 처형(처음에 그를 이용할 대로 이용해 먹다가 육체의 마지막 한 점까지 이용하도록 계획된)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세계, 이런 세계에서 개인의 자아는 끝내 그 가치를 상실할 수 밖에 없다. 
   만약 가제수용소에 있는 사람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노력으로 이에 대항해서 싸우지 않으면, 그는 자기가 하나의 인간이라는 생각, 마음을 지니고 내적인 자유와 인격적 가치를 지닌 인간이라는 생각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거대한 군중의 한 부분에 불과한 존재로 생각한다. 존재가 짐승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 떼를 지어 무리 한복판으로 슬금슬금 들어가려는 양떼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대오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려고 애썼다.....략....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우리는 글자 그대로 군중소에서 자신을 파묻으려고 애를 썼다. 

- 수감자들은 그 동안 끊임없이 구타 장면을 목격해 왔기 때문에 마음 속에서 스스로 폭력을 행사하고 싶은 충동이 커진다. 

- 강제수용소에 있었던 우리들은 수용소에서도 막사를 지나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거나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누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아주 극소수였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도 다음과 같은 진리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가지, 마지막 남은 인가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 수용소에서는 항상 선택을 해야 했다. 매일같이, 매시간마다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그 결정이란 당신으로부터 당신의 자아와 내적 자유를 빼앗아가겠다고 위협하는 저 부당한 권력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것이었다. 
그 결정은 당신이 보통 수감자와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자유와 존엄성을 포기하고 환경의 노리개가 되느냐 마느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었다. 

- 수면부족과 식량부족 그리고 다양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이 수감자를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해보면 그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 삶을 의미있고 목적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 사람이 자기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련을 받아 들이는 과정, 다시 말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가는 과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를 제공한다.
그 삶이 용감하고, 품위있고, 헌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이와는 반대로 자기보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고 동물과 같은 존재가될 수도 있다.
여기에 힘든 상황이 선물로 주는 도덕적 가치를 획득할 기회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말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권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 미래의 목표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퇴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한다. ......략........
그러나 실제 존재하는 현실에서 현재를 박탈하는 행위에는 어떤 일정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사실 수용소에서도 긍정적인 그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기회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것이 기회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쳐버린다. 
자시의 '일시적인 삶'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삶의 의지를 잃게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 앞에 닥치는 모든 일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 인생이란 치과의사 앞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앞에 앉을 때마다 최악의 통증이 곧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새 통증이 끝나있는 것이다.  <비스마르크>

-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스피노자>

-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수감자는 불운한 사람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과 더불어 그는 정신력도 상실하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퇴화시키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퇴락의 길을 걷는다. 

-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다.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여진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 지금까지 시련을 겪어오면서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을 잃은 적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나는 의외로 그들이 대체할 수 없는 것을 잃어버린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들은 희망의 이유를 갖고 있었다. 건강, 가족, 행복, 전문적인 능력, 재산, 사회적 지위 - 이것은 모두 나중에 다시 가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희망을 잃거나 포기할 의사가 없다는 얘기를 그들에게 들려 주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심지어 바로 한 시간 후도 내다볼 수 없기 때문에, 며칠 안에 전쟁상황에 엄청난 반전이 일어날 것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적어도 각 개인에게는 얼마나 엄청난 기회가, 그것도 아주 갑자기 찾아오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 "그대의 경험, 이 세상 어떤 권력자도 빼앗지 못하리!"

경험뿐이 아니다. 우리가 그 동안 했던 모든 일, 우리가 했을지도 모르는 훌륭한 생각들, 그리고 우리가 겪었던 고통. 이 모든 것들은 비록 과거로 흘러갔지만 결코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존재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간직해 왔다는 것도 하난의 존재 방식일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가장 확실한 존재방식인지도 모른다. 

- 우리가 처한 가혹한 현실에 과감하게 직면하자고 했다.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되고, 우리들의 가망없는 싸움이 삶의 존엄성과 의미를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확신 속에서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 어떤 사람이 수감자였는가 아니면 감시병이었는가 하는 단순한 정보만 가지고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할 수 없다. 인간의 자애심은 모든 집단, 심지어는 우리가 정말 벌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집단에서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집단과 집단사이의 경계선이 서로 겹쳐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천사, 저 사람들은 악마라고 부르면서 문제를 단순화시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 


-엄청난 정신적 억압을 받다가 갑자기 풀려난 사람은 도덕적, 정신적 건강에 손상을 입을 위험이 크다. 
이런 심리적 단계에서 원색적인 기질을 지닌 사람들이 수용소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야만성의 영향에서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그들은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이 자유를 마치 특허를 받은 것처럼 잔인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략.....
그들은 이제 폭력과 불의의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자행하는 가해자가 된다.
그들은 자기들이 겪었던 끔찍한 경험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 시킨다. 

-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을 때 겪게 되는 비통함과 환멸.
.... 몇년 동안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시련과 고난의 절대적인 한계까지 가보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직도 시련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 시련에는 끝이 없으며, 앞으로도 더 많은 시련을, 더 혹독하게 겪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로고테라피의 기본개념

- "정신분석을 하는 동안 환자는 침대에 누워서, 의사에게 때로는 하기 거북한 말을 해야 합니다. "
   "로고테라피를 받는 동안 환자는 똑바로 앉아서 의사로부터 때로는 듣기 거북한 말을 들어야합니다."

- 로고테라피는 환자의 미래에 초점을 맞춘다. 말하자면 미래에 환자가  이루어야 할 과제가 갖고 있는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는 말이다. 

- 어떤 학자들은 의미와 가치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나 반사작용 그리고 승화에 불과할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내자신의 경우를 얘기하자면 나는 단지 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을 위해 세상을 살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단지 내 '반사작용'을 위해 죽고 싶은 생각도 없다. 하지만 인간은 그 자신의 이상과 가치를 위해 살 수 있는 존재이며, 심지어 그것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존재이다. 

- 가치 있는 삶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그것에 대한 절망도 실존적 고민이지 정신질환은 아니다. 
후자의 견지에서 전자를  해석하다 보면 의사는 환자의 실존적 절망감을 한 움큼의 신경안정제로 해결하려고 하게 된다. 
하지만 의사의 역할은 이런것이 아니다. 의사는 환자의 실존적 위기를 통해 그가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이 마음의 평온을 가져오기보다는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내면의 긴장은 정신건강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삶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보다 최악의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 이미 성취해 놓은 것과 앞으로 성취해야 할 것 사이의 긴장, 현재의 나와 앞으로 되어야 할 나 사이에 놓여있는 간극사이의 긴장은 인간에게 본래부터 있는 것이고, 정신적으로 잘 존재하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말하자면 한쪽 극에는 실현되어야 할 의미가, 그리고 다른 극에는 그 의미를 실현시켜야 할 인간이 있는 자기장 안의 실존적 역동성이다.  

- 실존적 공허
; 그에게는 이렇게 해야한다고 말해 주는 본능도 없고,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쳐주는 전통도 없다. 어떤 때는 그 자신조차도 자기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를 정도가 되어버렸다.
그 결과 남이 하는 대로 따라 하거나(동조주의) 아니면 남이 시키는 대로(전체주의)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 실존적 공허는 가면을 쓰거나 위장을 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가 좌절되면  사람들은 권력욕으로 그 좌절을 대신 보상받으려고 하는데, 여기에는 아주 원시적인 형태의 권력욕인 돈에 대한 욕구도 포함되어 있다. 한편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가 좌절된 곳에 쾌락을 추구하는 의지가 대신 자리를 잡는 경우도 있다. 실존적 좌절을 겪은 사람들이 종종 성적탐닉에서 그 보상을 찾으려고 하는 것도 바로 이때문이다. 

-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된다. 그보다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다시말해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짊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 인생을 두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잊으면 잊을수록(스스로 봉사할 이유를 찾거나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것을 통해) 그는 더 인간다워지며, 자기 자신을 더 잘 실현시킬 수 있게 된다. 소위 자아실현이라는 목표는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자아실현을 갈구하면 할수록 더욱 더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아실현은 자아초월의 부수적인 결과로서만 얻어진다는 말이다. 

- "과연 이 모든 시련, 옆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느 이런 상황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일까? 왜냐하면 만약 그렇지 않다면 궁극적으로 여기서 살아남아야 할 의미가 없기 때문에. 탈출하느냐 마느냐와 같은 우연에 의해 그 의미가 좌우되는 삶이라면 그것은 전혀 살아갈 가치가 없는 삶이기 때문에. '

- 요즘은 신경질환보다는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정신과 의사를 찾는 환자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옛날 같으면 목사와 신부, 랍비를 찾아갔어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지금은 성직자에게 가지 않고, 의사를 찾아와서는 이렇게 묻는다.  "내 삶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 임종의 순간을 맞아 과거를 돌아본다고 생각하자 그녀는 갑자기 자기 삶이 갖고 있는 의미, 그녀의 고통까지 포함된 자기 삶의 의미를 볼 수 있게 되었다.

-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실존철학자들이 가르친대로 삶의 무의미함을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닌 절대적인 의미를 합리적으로 터득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 삶의 일회성
; 과거 속에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그 속에서는 모든 것이 고정된 상태로 보존된다.
...략.... 이 중에서 어떤 것을 무위로 돌리고 어떤 것을 실현시킬까? 어떤 선택이 단 한번의 실현을 '시간의 모래위에 불멸의 발자국'으로 만들 것인가? 언제나 인간은 좋든 싫든 자기 존재의 기념비가 될만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 인간은 대개 그루터기밖에 남지 않은 일회성이라는 밭만 보고, 그 행동과 기쁨과 심지어는 고통까지도 구원해준 과거라는 곡창은 그냥 지나쳐버리는 경향이 있다. 과거에서는 모든 것이 이미 이루어져 있으며, 그 어느 것도 사라질 수 없다. 과거에 '그랬었다'라는 것처럼 확실한 존재방식도 없을 것이다.

- 염세주의자는 매일같이 벽에 걸린 달력을 찢어내면서 날이 갈수록 그것이 얇아지는 것을 두려움과 슬픔으로 바라보는 사람과 비슷하다. 반면에 삶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사람은 떼어낸 달력의 뒷장에다 중요한 일과를 적어놓은 다음 그것을 순서대로 깔끔하게 차곡차곡 쌓아놓는 사람과 같다. 그는 거기에 적혀있는 그 풍부한 내용들, 그 동안 충실하게 살아온 삶의 기록들을 자부심을 가지고 즐겁게 반추해 볼 수 있다.

- " 가능성 대신에 나는 내 과거 속에 어떤 실체를 갖고 있어. 내가 했던 일, 내가 했던 사랑뿐만 아니라 내가 용감하게 견뎌냈던 시련이라는 실체까지도 말이야. 이 고통들은 내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지. 비록 남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말이야. "

- 예기불안 <공포는 사건의 어머니>
; 환자가 두려움을 느끼고 있으면 바로 그 증상이 정말로 나타난다.

- 과잉욕구 hyper-intention
; 쾌락은 어떤 행위의 부산물로 파생물로서 얻어지는 것이고 또 그렇게 얻어져야만 한다.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정도가 되면 그것은 파괴되고, 망가진다. 

- 역설의도 paradoxical intention 
; 신경질환 환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웃을 줄 알게 되면 그것은 그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상태, 아니 어쩌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 맞서 싸우기를 중단하고 대신에 아주 반어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비웃어 주면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고, 증세가 점점 약해지면서 결국에는 없어지고 만다.

- 예기불안은 역설의도로 좌절시켜야하고, 과잉의도와 과잉투사는 역투사의 방식으로 좌절시켜야 한다. 하지만 그 역투사는 환자가 자신의 삶에 주어진 특정한 과업과 사명을 바라보지 않으면 실현될 수 없다. 
; " 욕구의 초점이 갈등으로부터 사심없는 목표로 옮겨지면 노이로제 증상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전체적인 삶이 보다 건강해 질 수 있다. "

- 자기 연민이든 멸시든 간에 환자가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는 것은 아니다. 치료의 핵심을 환자가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데 있다. 

- 인간은 어느 순간에도 변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거대한 인간 집단의 행동을 통계적으로 분석한 자료를 통해서 얻은 사실뿐이고, 각 개인의 특성은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채로 남아 있다.   어떤 예측이든 거기에는 그사람이 처한 생물적, 심리적, 사회적 조건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 존재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인간은 그런 조건을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가능하다면 세계를 더 나은 쪽으로 변화시킬 수 있고, 필요하다면 자기 자신을 더 좋게 변화시킬 수 있다.

- 정신병도 인간 실존의 가장 깊은 곳까지 침투하지는 못한다.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 비록 사회적으로 쓸모가 없을 지도 모르지만 이런 사람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있는 법이다.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나는 정신과 의사가 되는 것이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정신과 의사가 되었단 말인가? 다시 고칠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된 뇌라는 기계를 고치기 위해서? 만약 환자가 그 이상의 존재가 아니라면 안락사도 정당화 될 수 있을 것이다.

- 인간의 얼굴을 한 정신의학
;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정신의학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그저 하나의 수단으로만 보았고, 그 결과 정신질환 치료를 하난의 테크닉으로만 간주해 왔다. 하지만 나는 이제 이런 종류의 꿈은 충분히 꾸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수평선 너머로 어렴풋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심리학의 얼굴을 한 의술이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한 정신의학이다.

- 아직도 자신의 역할을 그저 하나의 기능인으로 생각하는 의사가 있다면 그는 환자를 병 너머에 존재하는 하나의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기계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 사물들은 각자가 서로를 규정하는 관계에 있지만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규정한다.

- 나는 살아있는 인간 실험실이자 시험장이었던 강제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내면에 두 개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다.

- 우리 세대는 실체를 경험한 세대이다. 왜냐하면 인가이 정마로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을 만든 존재이자 또한 의연하게 가스실로 들어가면서 입으로 주기도문이나 셰마 이스라엘을 외울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비극 속에서의 낙관

- 비극
1. 고통  2. 죄  3. 죽음

- 낙관
; 비극에 직면했을 때 인간의 잠재력이
1. 고통을 인간적인 성취와 실현으로 바꾸어 놓고
2. 죄로 부터 자기 자신을 발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3. 일회적인 삶에서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동기를 끌어낸다.

- 유럽사람의 눈에는 미국의 문화가 인간에게 '행복하기를' 끊임없이 강요하고 명령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행복은 얻으려고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행복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그 이유을 찾으면 인간을 저절로 행복해 지다.  알다시피 인간은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내재해 있는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킹으로써 행복할 이유를 찾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 쾌락을 얻어야 한다는 원칙이 즐거움을 망친다.

- 실업으로 인한 신경질환
; 나는 환자들에게 청소년 기관이나 성인 교육기관, 공공 도서관 혹은 이와 비슷한 기관에서 봉사하도록 권유했다. 말하자면 이들이 엄청나게 남아도는 자유 시간을 비록 돈을 받지는 않지만 의미있는 일에 쓰도록 한 것인데, 그렇게 하자마자 경제상황에 변화가 없고 전과같이 굶주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우울증이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이 복지 정책에만 의지해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진 셈이다.

- 집단적 신경증후군 ;우울증, 공격성, 약물중독..

- 무엇을 경험하는 것은 무엇을 성취하는 것만큼 가치있는 것.
; 오늘날 미국에는 자신의 시련을 자랑스러워하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그것을 품위있는 것으로 만들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한 치유 불가능한 환자들이 많이있다. 그런사람들은 불행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불행하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고 있다.

- 삶의 순간들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시간들은 끊임없이 죽어가고 있으며, 지나간 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런 삶의 일회성이야 말로 우리에게 삶의 각 순간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 아닐까?

-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치 있다고 하는 것과 인간의 유용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치 있다고 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만약 이런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인간의 가치가 오로지 현재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유용성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히틀러의 계획에 따라 자해된 안락사, 즉 나이가 들어서, 불치의 병에 걸려서,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해서, 혹은 고통스러운 어떤 장애 때문에 사회적으로 더 이상 쓸모없게 된 사람들을 죽였던 '자비로운' 행위에 대해 변명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지그문트 프로이드가 이렇게 주장한 적이 있다.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모두 똑같이 굶주림에 시달리도록 해보자 .배고픔이라는 절박한 압박이 점점 커짐에 따라 각 개인의 차이는 모호해지고, 그 대신 채워지지 않은 욕구를 표현하는 단 하나의 목소리만 나타나게 된다."

감사하게도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강제수용소 안에서 일어난 일을 몰랐다. 그의 환자는 빅토리아 풍으로 호화롭게 디자인된 침상에 누어 있었지 아우슈비츠의 오물더미 위에 누워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말과는 달리 강제수용소에서 '개인적인 차이'가 모호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 차이점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사람들은 가면을 벗고, 돼지와 성자의 두 부류로 나뉘어졌다.
그런 것을 경험한 후, 우리는 더 이상 '성자'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략.....

성자와 같은 사람들이 소수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소수의 반열에 합류하려는 도전의지를 본다. .........략.................
그러니 이제 경계심을 갖자. 두 가지 측면에서의 경계심을.
아우슈비츠 이후로 우리는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히로시마 이후로 우리는 무엇이 위험한지를 알게 되었다.

posted by Dr.Hannah 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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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2010. 6. 1. 18:37



이 책을 처음 읽었을때 나는 실습학생이었다.
의사의 삶을 겨우 엿보기 시작했을 때였고,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개념이 없었을 무렵이었다.
학생때는 환자를 사랑한다든가 환자에게 친절하게 대한다는 것이 왜 어려운 것인지
이해 할 수 없었다.
내성적이고 사람을 대하기 어려운 내가
"환자"라는 사람을 대하는 일의 어려움을 짐작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그동안 사람과 관계 맺는 연습을 거의 하지 못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주인공 부뤼노 삭스의 태도는 인간애와 지혜로움이 가득하다는 면에서 내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타자의 시선으로 의사와 의료를 바라보려 한 노력, 의사의 시각으로 의사와 자신을 바라보려 한 노력..
객관적으로 그리고 사실적으로 의사와 환자를 벗겨낸다 하더라도 ..
여전히..아직도 ..
의사와 환자는 서로를 사랑하고 신뢰해야함을 믿을 수 있는 저자의 인간애가 놀랍다.

나는 친절하다. 아니.. 대체로 친절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아직 깊이 이해하여 동감하고 사랑하는 그런 의사가 못되었다. 
아직..이라고 했다. 
왜냐면 나는 나의 부족함을 알고 책망하고 닥달하여
환자가 아닌 사람을 사랑하고 함께할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인간이 되고자 노력을 계속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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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크라테스 선서

나는 의술을 실행함에 있어, 희포크라테스의 전통에 따라 명예와 성실의 규율을 충실하게 따를 것을 본 대학의 스승과 친애하는 동료 앞에서 맹세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무상으로 보살핌을 베풀 것이며, 내가 한 일 이상의 보수는 절대 요구하지 않을 것이빈다. 집안에 들어가도록 허락을 받았더라도 내 눈은 그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지 않을 것이며, 내 혀는 내가 들은 비밀들에 대해 침묵을 지킬 것이고, 내 처지를 풍속을 더럽히거나 죄를 이롭게 하는 일에 쓰지 않을 것입니다. (략)

혼자만의 대화 1(소개)

- 무슨 일이죠? 
  난 모르겠소. 그거야 당신이 말해야지! 난 의사가 아니니까.

병력
 
- 그는 최악의 장소를 선택했다. ..너처럼 돈을 빌어 개업하고 헛되이 기다리다가 18개월만에 간판을 떼어 내고 급기야 지역을 바꾸거나 공무원이 되어 버린 치들을 봐왔다. 의료 보험 공단의 출납계 감독 의료원이 되어 옛 동료들의 처방전 숫자를 세거나(어머니의 처방전에 따른 두 통의 진정제는 엄청나게 약을 남용하는 시누이를 위한 건 아닌가?) 남편의 휴직이 요통 때문인지 발목뼈가 삐어서인지 혹시 심각한 태업은 아닌지 확인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는 자들 말이다.
그러고는 예고도 없이 어느날 아침 들이닥쳐서는 <네 정원을 파헤치고 손을 좀 봐야 겠다>며 즐거워하는 치들. 그들은 욕구불만에 사로잡힌 자, 앙심을 품은 자들이지 더이상 의사가 아니다.

- 그들은 네가 아주 세심하다고 했고 아무런 요구가 없었는데도 다시 들러 주었으며 왕진 비용을 받으려 들지도 않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그저 친절에서 우러난 방문이라는 것이다. ...
하지만 날 더욱 거슬리게 했던 건, 내 진료 카드에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이다....거기에는 모든것이 기록되어 있었다. 검사결과, 전문의들과의 통화내용, 가족이 털어놓은 이야기들, 나로서는 한번도 유도 심문할 수 없었던 병력들, 환자들이 몰래 먹었던 약들의 목록, 외과 수술에 대한 너의 견해, 게다가 네 느낌까지 모두 다!....
넌 완전히 그런 부류의 의사 였다. 편협하고 극도로 도덕적이고 조금 멍청한 작자. 아니 아주 멍청한. 그러나 아주 존경받는.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의 존경을 받는 건 아니다. 

- 네가 개업한 이래 많은 내 환자들이 의사를 바꿨다. 그건 분명 나한테 좋은 일은 아니었다. 
미친 놈들(실체를 알 수 없는 복통환자. 상황에 따라 변하는 불평을 늘어놓는 자, 지긋지긋한 변비환자. 조종이 가능한 색녀, 외과용 메스에 집착하는 자, 고질적인 알코올 중독다, 증인 앞에서만 치고 받고 싸워대는 부부)이야 차라리 떨어져 나가 버린 게 다행이었다. 내가 개업했을 때 그랬듯이 너도 그 작자들을 참고 견뎌야 한다. ...(략)......
그들은 40년간 보험료를 냈으며, 텔레비전에서 가슴을 다 드러내놓고 하는 수술을 보았으며, 매일같이 파킨슨병이나 알츠하이머 환자들의 새로운 치료법에 대한 정보를 받아왔다. 그래서 그들은 약이며 외과수술을 요구한다. 발목통증에 방사선을, 복통에 초음파를, 두통에 컬러 단층 촬영을 해주길 바란다. 

- 그 여자가 자넬 보러 갔다면 자네에게 얘길 하기 위해서지. 그걸 나한테 되풀이해 주라는 뜻은 아닐테니까...

- 삭스선생님한테는 적어도 얘기를 할 수 있고 그분은 설명도 잘해줘요.

- 그들의 얼굴, 조용하고 신중한 그들의 시선은 네가 적군의 새로운 대리인 (돈으로 매수된 개업의사, 청부살인의사)이  아닌지 살펴보려는 게 분명하다. 네가 경계 경보에, 이전 사람들이 되는 대로 처방했던 온갖 경계경보의 협주곡(채혈도 조금 하고 엑스레이도 찍고 식이요법도 하고 링거도 주고 주사도 주고 더이상 버틸 수 없을 때면 전문가의 견해가 필요하다며 오래는 아니고 단지 무슨일인가 알아보기 위해 필요한 시간 만큼만 입원을 해야한다고 말하는...)에 동참할 것인지  보려고 기다린다. ...(략)....
하지만 헌신적인 딸의 열정적인 사랑, 눈물 젖은 엄마의 감동적인 사랑에 충분히 힘을 주고 지지해 주었으며, 그들이 확신(어쨌거나 저는 딸이니까 무슨 말을 해야하는지 알아요)을 잃지 않도록 해주었고, 뭔가 안 좋으면 해결책을 찾아야한다는 확신(제가 의사는 아니지만 그 애 엄마거든요)을 지니도록 했다. 적어도 저항을 하는 부류가 아니라면..

- 그들이 먹지 않는 까닭은 음식이 싫어서가 아니라 -여자들은 남자들이 좋아하는 음식만을 준비하니까- 더이상 <여자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략)..
친할머니는 손자를 위해 맛난음식을 잘도 만들어주었지만 그 손자와 결혼한 아내는 자기식대로 요리를 한다. 그런대도 남편들은 자기 엄마가 해주었던 음식을 아내에게 해달라고 계속 조른다. 

- 한숨을 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너는 처방전을 찢더니 휴지통에 버린다. 처방전을 다시 꺼내 화를 내며(의사들이 자시의 방식으로 환자를 돌봐 줄수 없을때 그러듯이 말이다. 하지만 난 내게 필요한게 뭔지 안다. 어쨌거나 변비로 고생하는 사람은 나 아닌가!) 내가 요구한 내용을 써서 건네주며(자! <얼마>입니다!) 경멸하는 태도(보험료도 충분히 냈고 게다가 진찰비도 냈는데도)로 혹은 이전에 있던 의사처럼 큰 소리로 날 비난하거나(그 역시 젊은 의사 였다. 친절했고 얘기도 잘 들어줬는데 어느날 성질을 부렸다..략..) 혹은 되몽의 네 동료처럼 (웃지도 않고)<부인 저로선 부인께 해드릴 일이 아무것도 없네요>라고 말할 줄 알았다. 하지만 너는 처방전을 다시 꺼내 뭔가를 적고 있다. ..(략)...

그 외에 다른데는 괜찮으신가?...

- 내가 정확하게 대답하는 걸 보고 의사가 왜 몹시 귀찮다는 표정을 짓는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말로는 아주 좋다고 하면서도 그다지 기뻐하지 않았던 것 같다.

- 사람들은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고 쓸데없이 돈을 낭비한다고, 의료보험의 재정자원이 고갈되었다고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다. 건강은 중요한 것이고 건강하지 않으면 몸도 돌보지 않고 평생을 일할 필요도 없다. 

혼자만의 대화 2

- 보통의사들은 병이 완치되는 걸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지 않아요. 의사들은 환자가 자신의 고통에 인내심을 가지는 일을 도와주지 않거든요. 의사들은 참을성이 없어요. 한데 선생님은 그렇지 않았어요.


임상검사

-  밤에는 언제나 똑같다고, 동일한 두려움과 늘 똑같은 상투적 언사들이 오간다고 너는 종종 말했다.
열이 나고 설사를 하고 구토를 하고 울어대는 아이 때문에 걱정하는 여자들, 아무 뚜렷한 이유도 없이 급작스럽게 호흡이 곤란해지는 남자들. 그런 일을 전할 때면 네가 화를 내거나 참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내가 도착하는 시간을 말해 주었소? 그 사이에 죽는답니까? 알았소. 남편이 운다고요? 그래서 어쩌라는 거요? 침대에 다시 눕혀 놓을 때까지 볼기짝이라도 때려 주길 바라던가요?
  가장 이상한 건 돌아오는 길의 망연자실한 네모습이다. 마치 오가는 동안 온갖 분노가 다 사그라든 듯한 모습.
기침하고 설사하고 덜덜 떨던 아이가 훨씬 나아진걸 보고 돌아온 그 짧은 시간에 말이다. 하지만 애 엄마는 그동안 수많은 이야기를 퍼부었고 전날 밤에 자기와 아이를 붙박아 둔 채 친구들이랑 흥청망청 놀아난 남편에게 혹독하게 대가를 치르게 하거나(이 빌어먹을 놈아, 매일밤 술에 곯아 지겹게 굴더니 일요일 저녁엔 날 부엌에나 가두어 놓다니!) 숨을 쉬지 못하는 그 남자는 천식이나 폐기종 환자가 아니라(그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떤지 알고 있고, 자시의 병을 호주머니 속처럼 훤히 알고 있어서 즉시 고통을 호소한다) 조금은 초라한 남자, 사돈의 팔촌의 결혼 피로연에서 거나하게 마시고 흥청망청 취해 새벽 늦게 돌아온 남자이다(이 망할 여편네야, 이료일 저녁 영화를 그 빌어먹을 바가지로 망쳐 놓고는 잘한다! 혹독하게 대가를 치를 테니 두고봐라 ..)
그리하여 밤은  종종 서로의 한풀이 시간이 된다.
  밤에 널 깨울때면 그 대가를 지불하게 될 거라고 말한다. 사사로운 일들로 쓸데없이 자리를 옮기게 했을 경우 30프랑을 더 내게 할 거라고. 그리하여 상심한 상태로 거의 녹초가 될때까지, 그토록 수많은 감정적 불상사륻, 꾹 참아 온 증오. 켜켜이 쌓인 오해의 불행한 증인이 되어야만 했던 비용을 말이다.

- 선생님이 진찰실에서 나와 사람들을 배웅하고 새 환자를 맞이하는 모습 그리고 한 번도 온적이 없었던 우리에게 인사하던 태도..

- 병이 어떤 것이든 간에 항상 무언가는 할 수 있습니다. 

- 넌 절대로 열나는 아이를 방치하거나 환자를 고통속에 놔두지 않는다. ...(략)...
다섯명의 환자가 있다고 하면 고통보다는 두려움이 많았던 네명의 환자는 의사가 도착하자마자 벌써 한결 나아진다. 다섯번째 사람은 진짜 괴로워서 몸을 비틀고 어디에 어떤자세로 몸을 두어야 할지 몰라 한다. ....
앞서의 환자들이 네 동료들 같은 의사를 만난다면 금세 고통이 완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수없이 들어왔던 얘기는 이런거다. 의사들은 자기 아버지나 형제까지도 고통속에 그대로 방치한다고. 거고는 아무것도 할 수없다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병의 징후를 가려서 안보이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고통이란 의사의 입장에서 볼 때 유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것은 환자에게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의사가 알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니까..)
하지만 환자들이 운좋게 널 만난다면 고통스러웠던 그 밤의 나머지 시간을 평온하게 보낼 수 있을 거다. 너는 환자가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고 해서 치료에 곤란을 느끼지는 않으니까.

- 언젠가 라디오에서 의과대학생들을 겨냥하여 고통에 관한 특수 교육을 신설하겠다는 보건부 장관의 얘기를 들은적이 있다. 20세기 말에 그런 제안을 하다니 참 부지런 하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장관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이었다.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는데 필요한 건 벌써 모두 가지고 있으니 그렇게 하길 원하기만 하면 되는데 말이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그 부분을 경시한다. 일단 그들은 대학 문을 나와 의료 행위에 접어들기 시작하면 환자의 고통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다.

정밀검사

- "거북하다고요?왜죠?"
  "제가.....선생님 시간을 뺏앗았잖아요..환자도 아니면서..."
 "그렇지 않습니다. 부인은 고통받고 있으니까요."

- 40년 동안 서로 만나지도 않고 살았던 거지.. .........(략)..............
내가 의사가 되었다는 엄마의 말에 롤랑은 "세상에! 거 참 잘 됐군. 좋은 일이야!" 라고 하며 연락처를 묻더니 그때부터 걱정거리가 있을 때마다 전화를 하는거야................(략)................
요컨대..난 그들을 안심시켜주고 일상사를 나누고 있지. 때로는 일주일에 세 통의 전화를 받기도 하고 때로는 반년동안 전화가 없기도 해. 하지만 결국 전화는 결려오지.......(략)................
그날 이후 난 그들과 일종의 공모를 하고 있어. 굳이 검사를 받으라고 하지는 않고 의사로서의 견해를 제공해 주는 거지..멀리 살긴 해도 어쨌거나 그 피를 나눈 친척 중 하나니까 적어도 거짓말을 늘어놓지는 않겠거니 하고 믿는 거지.
...............(략).............
하지만.. 나한테 전화를 하는게 그들 마음을 달래 주긴 하지만 보호해 주는 건 아니지..

- 이 직업을 끝까지 해내려면 미쳐야만 해. 그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납득하지 않은 채 생명을 구하고 싶어하는건 미친 사람들 뿐이야. 그렇지 않은 체 하는 놈들은 다 개자식 들이고.

- 증오하면서도 적응해 가는 그들에게 유일한 쟁점은 힘이었다.
카나페의 색깔과 욕실의 타일을 강요하는 힘. 아이들의 이름을 고르고 옷입히는 방식을 결정하는 힘. 의무의 이름아래 쾌락을 거부하는 힘. 개인의 자유라는 이름아래 쾌락을 훔쳐 내는 힘. 자기만의 욕구 불만을 정당화하기 위해 타인의 욕망을 거부하는 힘. 상대가 아무하고나 놀아나도록 방치하고는 관용과 이해로 용서함으로써 상대의 코를 꿰려는 힘.

- 대부분의 커플들은 서로를 증오하며 그것에 대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면서도 상징적, 사회적, 감정적, 물질적 의존성은 두사람 모두 심하기 때문에 헤어지는 일은 양쪽 다 거부한다.
왜냐한며 둘이 함께 이루어 내지 못했던 일들은 혼자서도 해낼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커플로 사는 일은 고독보다는 훨씬 편안하다. 그건 자기의 집을 가지는 일이고, 직장에 다니는 차 외에 주말용 차를 또 하나 가지는 일이며, 놈팡이나 창녀를 데리고 여행을 떠나 매일 잠자리를 할 수 있는 일이고(우연히 만나 잠자리까지 가는 건 너무 위험하고 모험을 감수해야 하니까!). 좋은 이자로 돈을 빌려 쓸 수 있고, 동정심을 유발하거나 질투심에 기죽지 않으면서 다른 커플들을 자주 만날 수 있고(적어도 당장에는) 아이를 만들 수 있고, 모두들 처럼 사회적으로 반듯하고 정상적인 모양새를 가지는 일이다. ...(략)....
모두들 사랑을 이야기 하지만 실은 타협만이 있을 뿐이다.

- 몸은 살아있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그 고통은 구원을 위한 것도 아니고 징벌을 위한 것도 아니며 그저 삶과 동칠체인 것이다. ....(략)....
몸은 빌어먹을 감각 기계이며 대부분의 감각은 불쾌하다. 왜냐면 시시각각 시간이 흐를 때마다 감각이란 것이 몸의 악화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갓 태어난 아기들조차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먹고 자는 것 같은 순수한 쾌락만 있는 게 아니다. 젖을 빨자마자 복통도 함께 찾아 들기 때문이다. 뽀뽀를 해주면 감기가 들고, 처음 맞이하는 여름엔 경련이 일고..

- 당신이 무슨 말을 하면 난 들어요. 당신이 뭔가를 읽게 하면 그 뒤에 뭐가 있나 이해하려 하고..

- 그 의사는 증명서 떼주는 일로는 절대로 돈을 받지 않는다고.

진단

- 각 질병의 이름은 다수의 의미 암시 연장 함축된 뜻, 변종들을 지시한다. 너무 많아서 동일한 한가지 병에 특징적 양상이란 거의 존재하지도 않을 정도이고, 단지 빈번히 나타나는 <형태들>만 있을 따름이다. 그 빈번한 형태들이란 <전형적>이거나 <예외적>인 것으로, 그것들이 유발하는 뜻밖의 표지들에 따라 규정될 뿐, 결코 그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략)...
사람들은 그런일에 관심이 없다. ......(략)........ 샤르코병을 가진게 아니라 근육이 녹아내리고 힘이 빠져나가 더이상 숨을 쉴수 없게 되고 심장 근육마저 녹아버리기 때문에 인공 장기 밑에 근육을 붙일 수밖에 없는 점진적 마비 상태에 빠진 것 뿐이다.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병을 가진게 아니라 아픈거고 고통을 받는 거고 몸이 말라 가고 구토를 하고 더는 잠을 못자고 눈물짓고 그리고 죽지도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다.

- 머저리 같은 년! 나는 그 여자에게 전화해서는 기유씨에게 사과하라고 했다. 그녀는 더듬거리며 어찌 대꾸해야 좋을지 모를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부종의 원인을 모를때는 이뇨제는 금기예요"
그래서 나는
"그럼 당신 머리는요. 그건 뭐에 쓰는 거요? 그 사람이 먹고 있는 수많은 양의 모르핀을 못봤소? 그 사람은 전이성 암화자요. 전이성이란 말이요! 뭘 두려워한거요? 그자를 죽일까 봐 겁이 났어요? 다리의 피부가 사방으로 터져 나가도록 놔두는게 낫단 말이오? 성기가 부풀어서 팬티조자 입지 못하고 있는 걸 보지 못했소?
아무것도 해주지  말고 그사람의 생명을 오래 연장시켜야 한다고 생각한거요?
삶의 가치. 그게 뭔지 당신은 알기나 하오? 멍청한 여자 같으니!"
난소암에 걸려야만 기유 씨가 지금 견디고 있는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면 당신은 차라리 직업을 바꿔야 할 거라는 말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 여자는 환자를 높은 곳에서 다루고 있었다. 의사들은 자기들이 그렇다는 걸 말해줘도 이해하지 못한다.

- 저런 남자는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 여자랑은 함께 있지 않을거다. 저 남자는 여자를 아무렇게나 대하도 않을 거고, 여자의 미소를 좋아한다고 가볍게 말하지도 않을 거다.
아내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는 남자들이 있다. 그리고 지겨운 여자들이 있다. 남자를 붙잡으면 절대 놔주지 않고 어린애 두셋을 후딱 낳아버린다. 그러면 남자는 오도가도 못하게 붙잡히는 거다. 너무 착해 빠지고 너무 멍청한.

- 결코 화를 내거나 미워하지 않으면서 고통을 함께 나누고, 상대에게 삼켜지거나 소외되지 않을 수 있는 그들의 능력과 행복이 기분 나쁘다.

- 어느 날 밤 당직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전화 교환워이 말하기를 어떤 여자가 설사제 처방을 위해 끔찍하게 먼 곳으로 와달라는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그때가 밤 12시 반쯤 되었을 거다. 자고 있지는 않았고 텔레비전에서 영화를 보고 있었지만 정말이지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 여자에게 전화를 했다. 여자는 불평섞인 늘어지는 목소리로 더는 참을 수가 없다고 반드시 들러 주어야한다고 하제가 필요하다고 했다. 내가 내일 아침 11시나 되어야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갈 수 있을 텐데 그것 때문에 40킬로미터를 오갈 수는 없다고 하자 그녀의 목소리가 엄청 커지더니 귀를 멍멍하게 할 정도로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마침내 여자는 소리를 질렀다.
"아, 선생님은 어쩜 저의 남편과 똑같아요."

- 논문속에 열거된 병들 자체는 추상적 체계화의 산물일 뿐이라는 사실은 아주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실제로 우리는 의학서적에서처럼 죽지는 않는다.

- 나는 그 환자에게는 굳이 그 작업이 필요하지도 않은데 어째서 그렇게 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교수는 <교육적>인 목적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 논문은 그 병의 모든 단계를 묘사하고 있었어. 처음부터 끝까지...난 아버지의 병을 고쳐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아버지에게 자신의 죽음을 보여 주었던 거야!


혼자만의 대화

- 아빠가 집에 있을 때 자길 위해 있지 않다는 걸 견디지 못한거예요. 하지만 어마도 자기 학생들 답안지를 고쳐 주고 있을 때면 아무도 돌보지 않았으면서 말이에요.......(략).................
엄마는 끊임없이 아빠를 괴롭혔어요
"뭐하는 거예요? 좀 봐도 돼요? 지난달 그림은 끝냈어요? 그것 좀 볼수 있어요? 보여 줄래요? "
그래서 아빠가 결국 그림을 보여 주면 결코 잘했다고 하는 법이 없었어요.
"왜 여긴 이렇게 했냐, 왜 저긴 저렇게 하지 않았냐?"
결국 아빠는 엄마 얼굴을 보지 않고 목소리도 듣지 않으려고 아틀리에로 가버린 건데, 엄마는 그 사실을 몰랐던 거죠!


치료

- 대장은 나를 경멸하듯 훑어보고 자신의 무기 손잡이를 어루만지며 위압적인 태도로 말을 던졌다.
"의사선생, 난 50보 떨어진 거리에서도 사람을 죽이오."
나는 이를 드러내며 대답했다.
"대장님, 저는 지척의 거리에서도 아무도 죽이지 않습니다."
                                               <아브라함 크로커스의 잃어버린 말들 중>

- 하지만 기다리는 일은 귀찮지 않아요. 이 의사 선생님은 언제나 필요한 만큼 저를 진찰하고 검사를 해주니까.
...............(략).........................아주 좋은 의사요. 삭스선생님은. 아이들한테 아주 부드럽게 하지요..
그 밖에 모두한테도 말이요. 이제는 일이 너무 많지만 그래도 좋은 의사요. 인내심 있고 거만하지 않고..
난 오래 전부터 박사님한테 치료받고 있는데 아주 만족해요..물론 모두를 다 만족시키지는 않지만 그거야 늘 그렇죠.
언젠가 이곳을 떠나 버릴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젠 그다지 믿지도 않아요.
응급 환자 때문에 떠나면서 저렇게 사과를 하는 의사는 많지 않아요. 종합병원에 간다는 말만하고 가는 사람도 많거든. 그런건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보험료로 돈을 얼마나 내는데..

- 이런 환상이 있다.
의사란 생리학, 병리학, 진단학, 치료학에 대해 아는 사람이다.
의사란 환자에게 가장 최근의 가장 효과적인 가장 고도의 치료방법을 제안하는 사람이다.
의사란 개개의 환자가 자신의 인격과 신념과 열망과 삶의 선택을 존중하는 가운데 자신의 상태에 가장 알맞는 치료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람이다.
의사란 인간이 고통과 좌절과 죽음을 모면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져다 주는 사람이다.

- 이런 현실이 있다.
의사란 고통을 일으키는 부위에 손가락을 대기위해 타인의 몸을 만지는 사람이다.
의사란 학계의 무수한 이론들, 개인적인 견해들, 경직된 선입관들, 비합리적인 믿음들 사이에서 선택하는 사람이다.
의사란 3주일을 기다려야 했을 텐데도, 석달 전부터 치료받기를 기다리는 열댓명의 사람들을 제치고 진찰을 받은 어떤 사람을 당장 <친구>로 얻게 되는 사람이다.
의사란 매일 보는 환자들의 숫자에 기뻐하는 사람이다.
의사간 된다는 건 열에 아홉 사람의 이야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우선은 자신에게) 숨기는 일이다.
의사들이란 다른 사람의 속내 이야기를 듣는 걸 우쭐해 하는 자들이다. 몸만큼이나 마음을 치유해 주었다고 공언하고 그걸 자랑스러워하는 나쁜 놈들이다.

- 그들은 더 이상 진단하지 않으며 다만 선고한다. 그들은 고통을 덜어주는 게 아니라 실험을 한다. 그들은 고쳐주는 게 아니라 측정을 한다.

- 의사가 되기를 선택하는 건 두 가지의 전공 혹은 두 가지의 훈련 방식 사이에서 선택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선 두개의 태도, 두개의 입장 사잉에서 선택하는 일이다. <박사님>의 입장과 <돌보는 사람>의 입장 사이에서 선택하는 일이다.
의사는 아주 흔히 돌보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박사님들이다. 그게 더 편안하고 혜택이 많으며, 저녁 모임이나 파티에서도 더 그럴 듯하며 보기에도 더 좋다.
박사는 <정통하며> 그의 지식은 나머지 모든 것보다 우월하다. 돌보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고통을 줄이려고 애쓴다. 박사는 대학에서 베끼듯 배워온 분석틀에 딱 맞는 화자들과 징후들을 기다린다. 돌보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자신의 빈약한 확신에 의문을 제기하면서)최선을 다한다.
박사는 처방을 한다. 돌보는 사람은 생각을 한다.
박사는 언변과 권력을 연마한다. 돌보는 사람은 스스로 연마한다.
환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박사를 마주하든 돌보는 사람을 마주하든 어쨌거나 죽어 갈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죽어갈 것인가?

- 의사들은 거짓말을 한다. 진실을 말하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환자들이 진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의사들을 강요하지는 않을거다!
의사들은 괴로워한다. 환자를 고통스럽게 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환자들을 살려내기 위해 모든 시도를 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일로 의사들을 비난하지는 않을 거다.
의사들은 실험을 한다. 가학적이어서가 아니라 학문을 발전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걸 못하게 막지는 않을거다.

- 언젠가, 무작위로 의사들에 관한 앙케이트를 하던 어떤 멍청한 작자가 놀랄 것도 없는 현실을 발견했다.
   그는 의사들이 술을 마시고 마약을 복용하며 실의에 빠지고 담배도 피우고 섹스는 잘못하고 경마장이나 카지노에서 큰돈을 걸기도 하고 측근들을 때리기도 하고 아이들을 방치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 어리석은 삶을 더는 어쩔 수 없을때 수중에 남아 있는 삶이 너무도 끔찍하게 싫어 자살을 하기도 한다.
이 모든게 통계학적으로 볼 때 계몽되지 않은  <일반대중>보다 의사에게 더 자주 있는 일이다. 

   의사들이 불쌍한 작자들이라는 것, 자신의 빌어먹을 직업에서 개인적인 성취감이나 사소한 이득조차 끌어낼 줄 모르는 작자들이라는  걸 이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자기들의 온갖 지식에도 불구하고 의사들 역시 죽고 만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잘 드러낼 수 있겠는가?


경과예측
       그리고 모든게 끝나면, 나는 살아갈 거다  - 라파엘 마르쾨르

- 의술이란 모든 의사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걸려드는 병이다.
어떤 의사들은 그 병으로부터 지속적인 혜택을 끌어낸다.
다른 이들은 어느 날인가 자신의 흰가운을 반납하기로 결심한다. 약간의 상처가 남더라도 그것이 유일한 치유책이기 때문에..
posted by Dr.Hannah Son
:
독서 2010. 5. 31. 12:37

 


1992년 가을..
그 이전에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몰랐다.
선생님이 내가 알고 있는 가장 그럴싸한 직업이었지만, 유년 시절 내게 많은 상채기를 내었던 존재이기도 했던 터라 거부감이 없잖아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의사가 되고 싶어졌다. 
현재 나는 의사가 되었고, 그간 여러번 이책을 반복해 읽었다.
처음의 의미는 기억나지도 않지만..
이 책의 주인공 맨슨이 지향하는 길이 의사의 바른 길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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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브라이네리라는 석탄광 지역에서 대진의사로서 의업에 발을 들여놓게된 앤드루 맨슨.
그곳에서 뜻이 맞는 동료 데니와 자신의 신념까지 이해하고 사랑해 줄 크리스틴을 만나게 된다.

-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진단하고 처리해야 할 환자를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이런 직무에 처해서 자신이 너무도 신경과민이 되어 있다는 것, 경험이 없다는 것, 게다가 전혀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사실이 갑자기 뼈아프게 의식되었다.

- 데니는 앤드루를 만난지 얼마 안돼서 영국에는 정말 어리석거나 환자를 속이는 것 외에는 능력이 없는 돼먹지 못한 의사가 몇천 명씩 있다는 식의 참을 수 없는 이야기로 그의 화를 돋구었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데니의 말 속에 다소의 진리가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 사람들은 이 불결하기 짝이 없는 존재 때문에 생명을 빼앗기는데 쓸모없는 관리들은 수수방관한 채 아무런 대책도 강구하지 않는 것이다.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병상 언저리를 서성대거나 약병을 만지작 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 그는 약을 조제하는 인간가 그것을 분별없이 먹는 인간을 언제나 냉소했다. 그는 효과가 있는 약이란 반수가 될까 말까 할 뿐 나머지는 모두 비료가 될 뿐이라고 냉소적으로 비아냥 거렸다. 한밤중에 조용히 데니의 말을 되새겨 보니 뚜렷하지는 않으나 어떤 절실한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 같았다.

- "" 여기 왔을 당시에는 머리 속에 약 처방에 관해서 가득 차 있었어요. 모두가 믿고 있거나 믿고 잇는 척하는 그런 것들 말입니다. .......(략) ...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약 가운데는 오히려 둑이 되는 게 있다는 사실이에요. 제도 탓이죠. 환자가 진료소에 오면 으레 약병을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리고는 그게 볶은 설탕이거나 중조이거나 아니 그냥 맹물이라 할지라도 상관업이 받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방은 라틴어로 쓰게 되어 있어요. 환자가 알지 못하게 말이죠. 이건 옳지 않아요. 과학적이지도 않구요. ..
(략)..증상을 따로 따로 취급한단 말입니다. 머리속으로 증상을 이것저것 묶어서 생각해 본 다음 진단을 내리려고 하지 않아요. 언제나 바쁘니까 그들은 지체없이 말하죠. '아 두통이라구요, 그럼 이 가루약을 드시오'라든가 '빈혈이군요. 철제를 서부해야 겠군요'라고. 그 두통이나 빈혈의 원인을 의사들은 생각하려고 하지 않아요"
....(략)..........
"... 하지만 평범한 지방 의사라고 해서 그저 덮어놓고 고약이나 주고 약이나 조제하면 되는 것일까요? .........(략)...
구석진 시골에 있는 지방의사라 할지라도 병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온갖 기회가 많으며 어떤 병원보다도 새로운 병에 관한 최초의 증상을 관찰할 수 있는 보다 좋은 기호를 접할 수 있다고 믿어요. 환자가 병원에 실려 올때는 대개 이미 초기 증세는 지나 있으니까요."

- 아직도 그는 자기에게는 아무런 실제적인 지식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 머리로 생각하고 직접 그 원인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잘 알고 있는 것의 배후까지도 추구해 보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일깨웠다. 일을 소홀하게 여기거나 금전에 현혹되거나 성급히 결론을 내리거나 '전과 같은 조제'라고 쓰지 않도록 한결같이 빌었다.


2부
어벨라우어에서 조합의 조수로 자신의 담당환자를 갖게 된 맨슨
크리스틴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의학 박사 학위를 따게 된다. 지적으로 임상적으로 점점 성장하는 맨슨의 이야기..

- 앤드루의 안목으로만 본다면 그는 단순히 데니가 말하는 소위 평범한 개업의로서 '선량한 구식'에 속하는 유형으로, 빈틈이 없고 어려운 일은 많이 겪었지만 자기의 환자나 일반 세상으로부터 감상적인 대접을 받으며 20년 동안 의학서 한 권 읽어본 적이 없는 위험하다 할 만큼 시대에 뒤떨어진 의사에 지나지 않았다. 

- "저는 어떤 일이라도 처음부터 덮어놓고 믿지 말자고 늘 제 자신에게 타이르고 있습니다. "

- "여지껏 번 돈이라 해도 어차피 죄다..는 아니라도 대부분은..써야 하잖아요?"


3부
런던에서 개업하고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맨슨
돈과 명예에 집착하면서 크리스틴과 자신의 신념과는 많이 냉담해 지고 만다.
결국 환자가 눈앞에서 죽는 경험을 하고 나서야 자신의 변화를 깨닫지만, 크리스틴을 사고로 잃고 또다시 좌절하고 만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바닥까지 절망하고나서야 빛을 보는 맨슨..

- 그러나 그것은 그가 바라는 환자가 아니라 3실링 6펜스의 진찰료와 5실링의 왕진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순수한 의사로서의 직무인 것이다. 그의 병원을 찾거나 왕진을 의뢰해 오는 사람들은 실제로 병들지 않으면 의사의 신세를 지는 일이란 꿈에도 생각지 못할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 "..전에도 어느 파티에서 자선가라 칭하는 한 머저리가 일어나서 한다는 소리가 가관이었지. 즉, 가난한 자는 아무래도 구빈원에 가야 옳다는 거야. 모든 것을 종이에다 적게끔 강요하지. 수입은? 종교는? 어머니는 친어머니냐? 하고 말이지. 그런데 본인은 복막염이지 뭐야 ! .."

- "대책이란 지방 분산이지..(략).. 런던 시내에서 약 15마일 떨어진 녹지대에 큰 병원이 있어 나쁘란 법은 없지. 예컨대, 불과 10마일 떨어진 밴함 같은 곳은 아직도 녹색의 전원이며 신선한 공기와 고요가 있지 않냐 말야. 교통이 불편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어. 지하철이면, 그럿도 병원 직행노선을 특별히 신설해도 좋을테고. 일직선으로 하면 배남까지 정확히 18분이면 갈 수있어. 가장 속력이 빠르다는 구급차가 부상자를 싣고 오는데 평균 48분이 걸린다는 걸 생각하면 굉장한 진보지. 사람들은 병원을 이전하면 각 지구로부터 의료시설을 뺏아가는 결과가 된다고 할지도 몰라. 천만의 말씀! 무료 진료 시설은 각 지역에 그대로 둔 채 병원만 이전시키는 거야........(략)................
특별히 지역을 한정하질 않으니 모두들 도시의 중심으로 흘러 들어오는 거지. 부명히 말해서 그 혼란이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을 정도야. 헌데 그 대책이 전혀 없어. 전연 아무것도 없어. 깡통을 두드리거나, 무슨 무슨 날을 정하는가 하면, 탄원, 몇 푼 안되는 기부금 모집에 학생을 분장시켜 꼭두각시를 만드는 등 옛날 걸 그냥 답습하고 있을 뿐야."

- 이 정도의 장식이라면 진찰료 3기니는 극히 당연한 요금일 것이다.

- 그가 근무하는 병원에서의 평판도 계속 높아지기만 했다. 외래환자부에서 일하는 시간은 줄어들었으나, 시간의 부족은 숙달된 기술로 보충하면 된다고 자신에게 타일렀다.

- 두 번째 환자가 찾아왔다. 45세인 미스 바스덴이라는 여자 였는데 그의 신봉자 가운데 가장 충실한 환자 중 하나였다. 그의 마음은 그녀의 모습을 보자 웬지 모르게 무거워졌다. 부자이고 이기주의고, 심기증인 그녀는 일찍이 그가 햄프슨과 함께 셰링턴 요양원에서 진찰했던 레이번 부인을 조금 젊게, 그리고 한층 더 이기적으로 빚어 놓은 것 같은 여자였다. 
 
    그는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그녀가 며칠 전에 진찰을 받은 이후 자기 몸에 생겨난 갖가지 증세에 대해서 미소를 띄우며 길다랗게 늘어놓는 것을 지루하게 듣고 있었다. 문득 그는 고개를 쳐들었다.
"바스덴 여사, 당신은 왜 진찰을 바으러 오시는 겁니까?"
그녀는 말허리를 끊긴 채 입을 다물었다. 얼굴의 윗부분에는 아직도 즐거운 듯한 표정이 남아있었으나 입은 어이없다는 듯이 반쯤 벌려진 채였다.
"아니 이거 실례했읍니다. 오시라는 말씀은 내가 했었지요.
하지만 사실 당신에게는 아무데도 나쁜 데가 없습니다. "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그녀의 온갖 증상이 돈 때문에 생긴다는 것을 잔인한 형안으로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녀는 여지껏 하루도 일을 해본 적이 없어서 몸은 연약하고 안일에 빠져 있었으며 영양과다에 걸려 있었다. 불면증을 호소하지만 그것도 근육을 쓰지 않기 때문이었다. 두뇌조차도 그녀는 써본 적이 없었다. 이자와 배당금을 계산하고 가정부에게 잔소리를 하고 자기와 애견 포멜러니언의 식단을 꾸미는 것 말고는 전혀 할 일이 없었다. 따라서 그녀는 이 진찰실에서 나가는 즉시로 뭔가 실제적인 일을 하면 나을 것이다. 작은 환약이라든가, 진정제라든가, 설사약을 비롯한 일체의 쓸모없는 약을 끊으면 나을 것이다. 자기 재산의 일부분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면 될 것이요, 자기만을 생각하지 않고 남을 도와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짓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나 권한다는 것은 헛수고일 뿐이다. 그녀는 정신적으로는 죽은 사람과 똑같은데 아아, 나또한 그와 같은 부류의 인간이 아닌가.
그는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바스덴 여사, 이제 이 이상은 치료를 못하게 되었어요. 아마 어쩌면 다른 곳으로 갈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 근처에는 다른 의사도 많으니 당신의 진찰은 기꺼이 맡아 줄 걸로 생각됩니다. "

- "나는 이제 자네와 제휴할 수가 없다네 프레디, 나는 염증이 생겨 견딜 수가 없어. 이 근처에는 이리 같은 친구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정직하고 훌륭하게 의사로서 몸바치고 있는 사람도 적지는 않지만 말이야. 그러나 그 이외에는 무두 이리와 다름이 없어. 필요도 없는 주사를 놓거나, 조금도 해롭지 않은 편도선이나 맹장을 도려내거나, 서로 끼리끼리 환자를 마음대로 농락해서 요금을 분배하거나 아니면 낙태수술을 안하나, 불확실한 과학요법을 뒤에서 밀지 않나, 즉 말하자면 쉴 새 없이 돈만 쫓아다니는 이리떼가 아닌가 말이야"
.....(략)..
"...하지만 나는 이제 다시는 돈이나 물질적인 성공같은 건 생각지 않기로 했어. 그런 것은 좋은 의사라는 증명이 될 수 없어. 의사가 1년에 5천 파운드씩이나 벌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무슨 부정이 있다는 증거일세. 게다가 인간이라는 자가 괴로워하는 사람들로부터 돈을 빨아들이다니 대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 "계획은 중요해. 하지만 문제는 그 계획 배후에 있는 이상이야. ...(략)...
경험에만 의존하는 것도 안되고 가짜요법도 안되. 처방을 멋대로 만들어도 안되고 엄청난 요금도 안되지. 부자 만능 근성도 안되고 심기증 환자 추종도 안되. .."

- "스패링거가 반대에 부딪치고 경멸당하고 죄까지 짊어지며 연구나 치료에 자신의 재산을 탕진하고 궁핍 속에서 악전고투하고 있었을 때, 학위를 가진 자들은 자동차를 타고 공기처럼 자유롭게 살면서 비싼 치료비를 받고 있었습니다."

- "....(략)...나는 사기꾼들과 함께 일할 생각은 없습니다. 엉터리 약을 믿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편 배달 때마다 던져지는 지극히 과학적임을 과시하는 광고문도 반은 봉투를 뜯지 않을 정도입니다...(략).........
  만일 의사 이외의 인간이 모두 나쁘고 의사가 행하는 일만이 옳다고 우긴다면 그것은 과학적 진보의 사멸을 의미합니다. 의사의 사회는 보잘 것 없는 동업 옹호 사회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지금은 바야흐로 동업자끼리 질서를 개혁 정비해야 할 절호의 시기입니다. 본인은 표면적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으로 되돌아가 현재 의사의 구제할 수 없을 정도의 불충분한 교육에 생각을 돌이켜 주십시오. 의사 자격을 얻었을 때의 저는 사회에 있어서 위협 그 자체로밖엔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나의 지식은 몇개의 병명과 그 병을 고치기 위해 주어진 약뿐이었습니다. 산파가 사용하는 겸자조차 제대로 쓰지 못했던 것입니다.
   현재 내가 알고 잇는 것은 모두 그 후에 알게 된 것들입니다. 그러나 실지에서 얻은 기초 이상의 것을 배우는 의사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유감스럽게도 그들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다만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들은 과학적인 구성단위로 조직되어야 합니다. 대학 졸업 후의 강제적인 재교육시설을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과학을 제일선에 두고 옛날식의 약병 존중주의를 버리고 개업의 모두에게 배울 기회, 더불어 연구할 기회를 부여할 큰 기획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 영리주의는 어떻습니까? 무익한 돈벌이주의의 치료, 필요도 없는 수술, 가치도 없는 부수한 사이비 과학적인 특허설비...이런 것들은 어지간히 배제해도 좋을 때가 아닙니까?
의학계는 너무도 편협하며 또한 독선적입니다. 그 조직만 하더라도 정지상태입니다. 진보라거나 제도의 개혁 같은 것ㄷ은 생각지도 않습니다. 말뿐으로 실천이 없어요. ....(략)...

우리들은 선구자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접골사 재비스를 위해서 감연히 마취를 행한 핵삼은 자신의 힘으로 개업하려 했을때 의사 자격을 박탈당했습니다. 10년 후, 런던에서도 일류의 외과의로부터 외면을 당한 몇백의 환자를 재비스가 완쾌시킴으로써 훈작 나이트 작위를 받고 온갖 '유명인사'들이 그를 천재라고 칭송했을 때 의학계는 슬그머니 양보하여 그에게 명예 의학박사의 칭호를 증정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미 그때는 핵삼은 실의 속에서 죽고 없었습니다. "

- 그는 나머지 길은 하나뿐이라고 엄격하게 자신을 타일렀다.
비겁한 행동은 결코하지 말자, 비굴한 행위나 우유부단한 태도는 털끝만치도 보여서는 안된다고 기도를 올리는 기분으로 생각했다.
posted by Dr.Hannah 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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