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2010. 6. 25.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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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 나는 전쟁의 추억을 얘기하기도 듣기도 싫다. 사람이 수없이 죽었는데 그런데도 진부하고 지루하다. 그러나 나는 역시 분방할 것일까. 내가 징용되어 지카다비를 신고 땅 다지는 밧줄을 잡아 당기게 되었을 때의 일만은 그다지 진부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 나는 그 젋은 장교 옆에 다가서서 문고판을 내밀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했으나 말이 나오질 않아 잠자코 장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을 때 내 눈에서 눈물이 방울지어 나왔다. 그 장교의 눈에도 눈물이 반짝였다.
- 어머니는 나의 건강을 자꾸만 걱정하셨지만 나는 오히려 더 튼튼해져, 이제 와서는 땅 다지는 밧줄을 잡아당기는 일에 남몰래 자신을 가지고 또 밭일에도 그다지 고통을 느끼지 않는 여자가 되었다.

- 전쟁얘기를 하는 것도 듣는 것도 싫다고 하면서 어쩌다 나의 '귀중한 체험담'을 얘기해 버렸으나, 나의 전쟁의 추억 속에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대략 이정도이다. 나머지는 그 시와 같이

  작년에는 아무 일이 없었다.
  재작년에는 아무 일이 없었다.
  그 먼저 해에도 아무 일이 없었다.

- 자신이 생각해도 지독한 소리를 하는구나 싶으면서도 말이 어떤 생물인 것처럼 애를 써도 멈추어지지 않았다.

- ...몸이 야윌 정도로 몹시 울었다. 그러는 중에 정신이 멍해져서 점점 어떤 사람이 그리워지고 그리워서 견딜 수 없고 얼굴이 보고 싶고 목소리가 듣고 싶고 양쪽 발바닥에 뜸을 뜨면서 지그시 참는 것처럼 기묘한 감정이 되어 갔다.

- 아무래도 더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허전함, 이게 그 불안이라고 하는 감정일까.

- 천 엔의 빚을 청산해야 하는데 일금 5엔.
세상에서의 나의 실력은 대강 이렇다. 웃을 일이 아니다.

- 전쟁! 일본의 전쟁은 자포자기다. 그 자포자기에 휘말려들어 죽는 건 싫다. 차라리 혼자 죽고 싶어.

- 인간은 거짓말을 할 때에는 반드시 진지한 표정을 짓는 것이다. 요즘 지도자들의 저 진지함.

- 남에게 존경받으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과 놀고 싶다. 그러나 그런 좋은 사람들은 나하고 놀아주지 않는다.

- 내가 조숙한 체해 보였더니 사람들은 나를 조숙하다고 수순댔다. 내가 게으름뱅이인 체해 보였더니 사람들은 나를 게이름뱅이라고 수군댔다. 내가 소설을 못 쓰는 체해 보였더니 사람들은 나를 못쓰는 사람이라고 수군댔다. 내가 거짓말쟁이인 체해 보였더니 남들은 나를 거짓말쟁이라고 수군댔다. 내가 부자인 체했더니 남들은 나를 부자라고 수군댔다. 내가 냉담을 가장했다니 남들은 나를 냉담한 놈이라고 수군댔다. 

그러나 내가 정말 괴롭고, 나도 모르게 신음했을 때, 사람들은 나를 괴로운 체 가장하고 있다고 수군댔다.
아무래도 이가 맞지 않는다.

- 아, 동생도 고통스럽겠지. 더구나 길이 막혀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아직도 아무 것도 모르고 있겠지. 다만 매일 죽을 셈치고 술을 마시고 있겠지. 차라리 눈 딱 감고 본질적으로 불량 청년이 돼 버리면 어떨까. 그렇게 되면 오히려 동생도 즐거워질 게 아닐까. 

  불량이 아닌 인간이 있을까? 가고 그 노트에 씌어 있었지만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불량이고, 외숙도, 어머니도 모두 불량 같이 생각된다. 불량이란 친절한 것이 아닐까.

- 그러나 나의 지금의 생활은 그 이상의 무서운 것인 듯해서 M C를 의지할 것을 단념하지 못하는 겁니다. 비둘기처럼 순하게, 뱀처럼 영리하게, 나는 나의 사랑을 완수하고자 합니다. 

- 나는 결국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행동할 수 밖에 도리가 없구나,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난생 처음의 일이기 때문에 이 어려운 문제를 주위의 모든 이들에게 축복을 받으면서 해내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지독하게 복잡한 대수의 인수분해나 무슨 답안을 생각하듯 심사숙고하고, 어디엔가 한 군데 술술 풀려 나갈 실 끝이 있음직해서 갑자기 명랑해지기도 하고 합니다. 

- 6년 동안에 언제쯤부터인지 당신이 안개처럼 내 가슴에 스며들고 있었떤 겁니다. 

- 문제는 당신의 회답입니다. 나를 좋아하는가, 싫어하는가, 그게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은가, 그 회답은 무서운 것이지만, 그러나 알아야 하겠습니다. 일전에 드린 편지에도 내가 억지 춘향이로 밀도 들어가는 애인이라고 썼고 또 이 편지에도 중년여자의 억지라고 썼습니다만, 지금 잘 생각해 보니 당신에게서 답장이 없다면 내가 억지를 쓰려야 쓸 수도 없고 혼자 멍청하게 야위어갈 뿐이겠지요.
역시 무엇인가 당신의 답장이 없다면 소용없는 노릇입니다. 

- 재미있는 말이군. 딱지가 붙었으면 오히려 안전하고 좋지 않을까. 방울을 목에 걸고 있는 새끼 고양이처럼 예쁘지 않아? 딱지가 안 붙은 불량이 무서운 거야.

- 세상에서 좋은 사람이라며 존경받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고 가짜라는 걸 나는 알고 있어요. 나는 세상을 신용하지 못하는 겁니다. 딱지 붙은 불량배만이 나의 편입니다. ..............만인에게 비난을 받아도 그래도 나는 답변할 수가 있어요. 너희들은 딱지도 붙지 않은 가장 위험한 불량배가 아니냐고.

- 나오지의 얘기를 들어 보면 내가 사모하고 있는 사람의 신변 분위기에 나의 체취는 눈곱만큼도 스며들디 않은 듯하다. 나는 부끄럽다는 느낌보다도 이 세상이라는 것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기묘한 생물 같은 기분이 들고, 나 하나만 남겨놓고 다 어디론가 가 버려 불러도 소리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땅거미 지는 광야에 서 있는 듯한, 이제까지 맛보지 못했던 처참한 기분이 엄습했다.

이것이 실연이라는 걸까. 광야에 속수무책으로 서 있는 동안에 해가 꼴딱 지고 밤이슬에 얼어죽는 수 밖에 다른 수는 없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니 눈물도 나오지 않는 통곡으로 두 어깨와 가슴은 마구 뛰고 흔들려 숨도 쉴 수 없는 심정이 되는 것이다.

- "어두운 데서 가만히 누워 계시는 것이 싫으시죠?" 라고 선 채로 물으니까,
   "눈을 감고 누워 있으니까 마찬가지예요. 조금도 쓸쓸하지 않아. 오히려 눈이 부신 게 싫어요. 앞으로는 안방에 불을 켜지 말아줘." 라고 하신다.

- 나에게는 경제학이란 것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지도 모른다........... 인간이란 인색한 것이고, 그리고 영원히 인색할 것이라는 전제가 없으면 전혀 성립되지 않는 학문이다. 인색하지 않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분배의 문제나 기타 문제에도 아무런 흥미가 없는 일이다..

- 파괴는 불쌍하고 슬프고, 그리고 아름다운 것이다. 다시 건설해서 완성하려는 꿈. 그리고 일단 파괴하면 영원히 완성의 날이 없을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그리운 사랑 때문에 파괴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 ..슬픔의 바닥을 뚫고 나간 마음의 안정이라고나 할까, 그 같은 행복감에 흡사한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 행복감이란 것은 비애의 강바닥에 가라앉아 희미하게 빛나는 사금 같은 게 아닐지. 슬픔의 극치를 통과해서 기이한 엷은 빛을 보는 심정.

- "나는 모르겠다. 세상을 아는 사람은 없는 게 아냐? 언제까지 가도 모두 어린애예요.........." 
그러나 나는 살아 나가야 하는 것이다. 어린애일지라도 어리광만 부리고 있을 수는 없다. 나는 이제부터 세상과 싸워 나가야 하는 것이다.

- 어머니가 마침내 돌아가시게 되자 나의 로맨티시즘이나 감상은 차츰 사라지고, 뭔가 나 자신이 마음 놓을 수 없는 나쁜 지혜를 가진 생물로 변해가는 심정이 되었다.

- 사람이 태어난 이상 아무렇게라도 끝을 볼 때까지 살아야 한다면, 이 사람들이 끝을 볼 때까지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모습도 노상 미워만 할 수 없지 않을까.

- 쓸쓸하다느니 고적하다느니 그런 여유 있는 것이 아니고 슬픈 거야.....자신의 행복도 광영도 살아 있는 동안에는 결코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사람은 어떤 심정이 될까. 노력? 그 따위 것은 다만 굶주린 야수의 밥이 될 뿐이야.

- 살아가고 싶은 사람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반드시 굳세게 끝까지 살아가야 하겠고, 그건 훌륭한 일이며, 인간의 영관이란 것도 그런데 있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죽는 일도 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나는 천해졌습니다. 천한 말투를 쓰게 됐습니다. .......지금에 와서 나의 천함은 60프로가 인공적으로 덧붙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래도 나머지 사십 프로는 진짜 천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 내던진 세계로 돌아갈 수도 없고, 민중으로부터는 악의에 찬,개떡 같은 정중한 대우를 받는 방청석이 주어질 뿐입니다.
 
- 인간은 모두 다 같은 것이다.
얼마나 비굴한 말입니까. 남을 업신여김과 동시에 자기 스스로도 업신여기고, 아무런 프라이드도 없이 모든 노력을 포기하는 말.

- 나는 놀면서도 조금도 즐겁지 않았습니다. 쾌락의 임포텐스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다만 귀족이라는 자신의 그림자에서 떠나고 싶어, 미치고, 놀고, 거칠어졌습니다.

- 나의 자살을 비난하고 끝까지 살아서 견디어야 했다, 고 나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입끝에서만 그럴싸한 표정으로 비판하는 사람은, 폐하께 과일 장사를 하시라고 태연하게 권고할 만큼이나 대위인임에 틀림 없습니다.

- 나는 죽는 편이 낫습니다. 나에게는 소위 생활 능력이 없습니다. 돈으로 남과 다툴 힘이 없는 거예요. 나는 남에게 엉겨붙지도 못합니다.

- 모두가 나로부터 떠나간다................어쩐지 당신도 나를 버리신 모양입니다. 아니 차츰 잊어가고 계시는 것이겠지요.
- 당신이 나를 잊어버린다 해도, 또 당신이 술로 목숨을 잃는 일이 있다 해도, 나는 나의 혁명의 완성을 위해서 건강하게 살아갈 것 같습니다.


인간실격

- 자신의 행복 관념과 온세상 사람들의 행복 관념이 전혀 딴판으로 어긋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불안...

- 나는 어릴 때부터 아주 행복한 아이라는 말을 들어왔지만, 나 자신은 지옥에 있는 것처럼 고통스럽기만 했고, 오히려 나를 두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편이 비교도 안 될 만큼 훨씬 안락한 것같이 나에게는 느껴지곤 했습니다. 
 
- 나에게는 재앙 덩어리가 열 개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만이라도 내가 아닌 이웃 사람이 짊어진다면, 그 한 개의 재앙 덩어리만으로도 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 버리게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일조차도 있습니다.

- 나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으면서도, 인간을 단념할 수는 정말 없었던 모양입니다.

-........ 결국은 처세를 잘하는 사람의 세상에 잘 통하는 핑계에 말려들 뿐이 아닐까.

- 반드시 어딘가 허술한 곳이 있음이 분명하고, 결국은 인간에게 호소하는 일은 헛수고에 지나지 않고, 나는 역시 진정한 얘기는 하지 말고 참고 견디며, 그래서 어릿광대 노릇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고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 아름답다고 느낀 것을 그대로 아름답게만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안이함과 어리석음. 대가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주관에 의해서 아름답게 창조하고, 혹은 흉측한 것을 보고 구역질을 하면서도 거기에 대한 흥미를 숨기지 않고 표현의 기쁨에 잠기고 있습니다.

- 그리고 그는 그 어릿광대 노릇을 의식 없이 실천하며, 더욱이 그 어릿광대의 비참한 점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나하고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 쓸쓸하다.
나에게는 천 마디 만 마디의 신세타령보다도 이 한 마디의 독백이 공감을 불러일으키리라고 기대하고 있지만, 이 세상 온갖 여자에게서 마침내는 한 번도 나는 그 말을 듣지 못했던 것을 기괴하고도, 불가사의하다고도 느끼고 있습니다.

- 겁쟁이는 행복조차도 두려워합니다. 솜에도 상처를 입습니다. 행복으로 상처를 받는 일도 있습니다. 상처를 받기 전에 빨리 이대로 헤어지고 싶어서 초조하여, 늘 쓰는 수법이 어릿광대 노릇으로 연막을 둘러치는 것이었습니다.

- 그건 세상이 용서하지 않는다
  세상이 아니고 자네가 용서하지 않는 거겠지
  그 따위 짓을 하면 세상으로부터 혼구멍이 날 거다.
  세상이 아니고 자네겠지
  두고 봐. 세상에서 매장되고 만다
  그건 세상이 아니고 자네가 매장하겠지
posted by Dr.Hannah 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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