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2010. 6. 18. 02:00




중학교 갈 무렵 유시민씨가 쓴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읽었다.
그 때의 나는 바로가는? 세계사도 몰랐던 때이기에 이것이 왜 거꾸로 보는 것인지도 몰랐으니..
언니들이 사모았던 유시민씨와 유홍준씨의 책들은 빈약한 나의 인문학적 소양에 간간히 투여되던 고단백 영양식이었던 듯 싶다.
역사와 사회를 보는 참신한 눈을 거부감없이 읽을 수 있을만한 환경의 특혜 쯤이라고 해야 겠다.

이 책은 자연인?으로서 유시민의 보여준 글이라 마음에 든다.
아직 정치를 하고 나랏일을 하던 때가 아니라 조심성이 많이 빠진 이 글이 참 맘에 든다.
대한민국 개조론은 문체마저 경어체이고, 마치 사춘기 소년이 갑자기 취직한 듯..
중립과 통합 속에서 고민한 흔적이 보여 조금 안쓰럽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좋은말만 하고 쓴소리는 삼키려 하기에 할 말을 다 못한- 사실 궁금했더 말을 다 못들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좀 피곤할진 몰라도 신뢰가 갈 것 같아서 무서울 게 없을 거 같아서 참 좋았는데..
이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하고 글을 쓴지가 벌써 10년이 넘었다.

정치권으로 흡수되어 들어간 후..내 생애에서 가장 바쁜 날들과 겹쳐 그동안 이 사람도 변화와 진화를 거듭해 왔다는게  조금은 낯설다.  전공책 사이에서 다른 책들을 밀어낸 후 총선 때문에 오랫만에 이 사람을 다시 마주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의 글을 읽을 때보다 더 조심스레 더 꼼꼼히 검증한 후에..
이 사람의 지지자가 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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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일사분란주의', '국론통일주의', '발본색원주의', 그리고 '광신적 반공주의'와 '연고주의'를 몰아내지 않고서는 민주주의도 사회정의도 제대로 실현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나는 이책에서 더러는 진짜 내 생각보다 더 과격한 견해를 일부러 내놓기도 했다.

- 적지 않은 경제적, 가정적 어려움을 무릅쓰고 내가 독립적인 지식인으로 살아가도록 비판하고 격려해주는 아내 한경혜에 대한 고마움만은 꼭 한마디 적지 않을 수가 없다.


생각의 감옥부로부터의 해방

자유주의자는 부당한 권위에 복종하지 않으며 집단의 위세 앞에 주눅들지 않는다. 술자리의 안주감으로 씹히고 괘씸죄로 걸려도 어쩔 수가 없다. 어느 시대든 신조를 지키는 데는 언제나 비용이 따르는 법이 아니겠는가?


- 자유주의자는 사상과 견해의 다양성을 존중한다......그래서 사회를 하나의 지배적인 사상에 복속시키려는 시도에 단호하게 반대한다. 특히 법률과 폭력을 동원해서 국민에게 특정한 사상과 견해를 강요하는 국가권력에 대해서는 저항과 불복종으로 맞선다. 그러면 국가권력은 그들을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좌익분자' '급진세력'이라는 이름을 붙여 가두고, 추방하고, 박해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한다. 자기가 자유주의자라고 항변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 " 리버럴한liberal  건 좋다. 하지만 리버럴리즘liberalism은 개떡이다. 민족적인national한 건 환영한다. 그러나 민족주의nationalism은 밥맛이다. 매사를 사회적인social 관점에서 보는 건 좋다. 그렇지만 사회주의socialism는 사양한다. "

- 공산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환경주의자, 자유주의자, 그리고 보수주의자가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경쟁하는 유럽의 민주주의 선진국에서 자신과는 다른 사상을 가진 사람의 존재를 존중하는 자유주의적 태도는 모든 '주의자'의 기본이다. 이 기본을 갖추지 못한 세력은 '극좌'와 '극우'로 분류된다. .................좌파의 모든 '주의자' 들은 극좡와의 연대를 거부한다. 우파의 모든 '주의자' 들도 극우와의 제휴를 거부한다.

- 진짜 자유주의자는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전면적인 자유의 실현을 위해 싸운다. 경제적 자유를 허용하면서 정치적, 문화적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는 존재할 수 없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로 성립한다.
앞으로 할 이야기는 모두 이런 관점에서 쓴 것이다.

- 나는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국익을 위하여'를 외치지 않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이승만과 박정희 씨는 '북진통일' '멸공통일' '국가안보' 라는 국익을 내세워 국민들의 자유를 박탈하고 시민의 권리를 빼앗았다. 경제성장이라는 국익을 앞세워 노동자의 파업권을 말살하고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봉쇄했다. 전두환씨와 노태우 씨는 국익을 위하여 수천명을 살상했고 천문학적인 액수의 '통치자금'을 조성했다. 김영삼 씨는 '구국'의 일념으로 3당합당을 감행했고 그 아들은, 적어도 주관적으로는 국익을 위해 일한 죄로 감옥에 갔다.

- 나는 국민 개개인의 이익을 다 합친 것이 국익이라고 생각하낟.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개인의 개별적 이익과는 구별되는 다른 차원의 국익이라는 것이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지난날 권력자들이 "국익을 위하여"라는 명분 아래 저질렀던 숱한 독선과 오만을 나는 아직 잊지 않았다. 

-  힘의 집중을 추구하는 것은 권력의 본질적 속성이다. 독선이 권력과 결합하면 '국익을 해치는 세력을 발본색원하여 국론을 통일하고 일사불란하게 내외의 도전에 총화단결 응전'하기 위해 국민의 입과 귀를 틀어막는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 제대로 된 자유주의자는 자신의 사상 그 자체보다도 그 사상를 표현할 수 잇는 자유를 더 소중히 여긴다. 나는 보수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진 않지만 그가 그 사상 때문에 탄압을 받는다면 그와 연대해 싸울 각오가 되어 있다.
 
- 이제 그와 같은 함정, 스스로 팠거나 극우세력이 파놓은 함정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한마디를 보수를 극우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자유민주주의를 극우에서 해방시키자는 말이다. 한국에선 반세기 동안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던 극우세력이 스스로 보수라 칭했고 더욱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킨다고 말해왔다 <홍세화>

- 극우는 극좌와 마찬가지로 보수와 진보가 공존할 수 있는 사상의 자유시장과 민주적 기본 질서를 파괴한다.
극좌와 극우는 민주주의의 적이다.

- 충무포럼의 자유주의는 자본주의 시장에서의 경제행위의 자유에 절대적인 비중을 둘 뿐, 다양한 가치관과 사상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는 그런 자유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 순수 시장경제에 대한 인위적 규제의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담고 잇는 사상과 사회운동에 대한 강력한 거부감이 이 경제적 자유주의의 반자유주의적 성격을 분명히 보여준다.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 1998>

- 고문 범죄자를 고문하지 않는다고 민주화가 된 건 아니다. 고문조작의 진상과 책임자를 규명하고 피해자에게 합당한 배상을 해야 제대로 된 민주사회라 할 수 있다.

- 온 사회를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복속시키려고 하는 개인과 정치세력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법률과 폭력의 심을 빌어 사상과 견해의 다양성을 말살하기 위해 "없는 사실을 조직"하는 전체주의적 언행은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 대한민국 국민은 법률에 어긋나지만 않으면 자기 돈으로 무슨 일이든 다 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
   그러나 나는 정부가 그 일에 국고를 지원하는 데는 결단코 반대한다. 박정희를 숭배할 자유가 있다면 당연히 비판할 자유도 있다. 정부가 지원하려는 국고에는 박정희를 민주주의를 파괴한 독재자로 규정하는 사람이 낸 세금도 들어있다. 이 돈을 기념관 건립자금으로 주는 것은 이런 사람들의 재산권에 대한 침해이고 세계관에 대한 모욕이다. .............아직도 피가 흐르는 파시즘의 상처를 그대로 둔 채 가해자를 기리는 조형물을 만드는 터무니없는 짓에는 단 한푼의 세금도 보태고 싶지 않다.

- 북한 텔레비전 방송이 던져준 의문 때문이었다. 나라의 주인이요, 역사의 주체라고 주장하면서 그 인민대중에게 사회와 국가의중대한 문제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주지 않는 나라가 '좋은 나라'일 수 있는 것일까?

- 당신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확고한 안보태세는 국민 개개인이 북한 사회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많은 모순과 부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체제를 고치고 다듬는 쪽이 훨씬 낫다는 확신을 가지면 저절로 이루어진다. 전문적으로 국가안보를 팔아먹고 사는 장사꾼들이 없어져도 국가안보에는 아무 이상도 없다.

- 민족주의적 친북성향이 도가 지나치면 곤란한 상황이 발생한다. 국가권력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다른 요소들을 무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권력의 절차적 정통성과 경제적 능력이 그것이다. 김일성이 항일 무장투쟁을 했다고 해서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인민의 자유를 박탈할 권리가 있는 건 아니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봉쇄하고 정치적 반대파의 존재를 말살한 북한 체제는 절차적 정통성을 갖추고 있지 않다. ............략...................그 다음은 체제의 경제적 능력이다. 아무리 민족사적, 절차적 정통성이 있는 권력이라도 국민을 잘 살게 하지 못하면 몰락의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자연재해를 극복할 역량조차 없이 속수무책 제 국민을 굶겨 죽이는 북한 정권의 지도부는 범죄자라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대한민국의 헌법은 사상의 자유를 보장한다. 인간이 하는 일 가운데 절대적으로 옳거나 틀린 것은 없다. 한 점의 오류도 없는 사상이나 단 한 톨의 진실도 담지 않은 사상은 없다. 사상의 자유가 필요한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세상을 보는 눈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는 상이한 여러 사상 사이의 대립과 경쟁을 거쳐야 알 수 있다. 어떤 사상이 잘못된 것인지 아닌지 선험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사상의 자유는 당연히 잘못된 사상을 가지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포함한다. 폭력을 써서 자신의 사상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한 어떤 사상이라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사상의 자유다.

-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의 토론과 상호비판, 그리고 자신의 이론과 경험에 대한 성찰을 거치지 않은 사상의 변화는 모두 '강제된 전향' 일 뿐, 사상의 변화라 할 수 업삳.

- 정말로 주사파의 소멸을 확인하고 싶다면 그들에게 자유롭게 주체사상을 찬양할 자유를 허용하라. ...... 주사파에게 발언의 자유를 무제한적으로 허용하는데도 주사파를 자처하는 사람이 없을 때, 그때서야 당신들은 주사파의 소멸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문제는 원래부터 북한 텔레비전 방송 그 자체가 아니라 그에 대처하는 우리의 의식과 태도에 있다. 우리 국민들은 민주주의의 기본 질서를 소중하게 여긴다. 그런데 '안보 담당자'들은 여전히 '냉전의식이라는 정신적 감옥'에 들어앉아 쓸데없는 사회적 긴장을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 사실 진보는 극좌보다 보수와 잘 어울리고 보수는 극우보다 진보와 사이좋게 지내는 편이 맞다.

- 극단주의 정치세력은 언제나 '적'의 단점과 오류에 대한 비판과 비난을 자신의 사상을 정당화하는 '유일한' 근거로 삼는다. 극좌는 '자본주의 악덕과 제국주의 침략 분쇄'를 명분으로 삼아 자신들이 저지른 모든 형태의 범죄를 정당화 햇
다. 극우가 '공산주의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저지'라는 명분아래 합리화 하지 못한 범죄는 없다. 그들은 '우리 편이 아니면 모두 적'이라고 믿는 점에서 배짱이 맞는 호적수다.

- 진짜 자유주의자는 자기가 사는 사회의 극단주의 정치세력과 싸운다.

- 파시스트의 이상향도 '한 사람의 양치기와 수천 마리의 양떼로 이루어진 전체주의 사회'다. 이런 사회를 조직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 우선 양치기는 '지도자의 천분을 타고난 영웅'이어야 하고(영웅주의), 양은 개체로서가 아니라 양떼 전체의 일원으로서만 생존의 근거를 가질 수 있으며(국가주의와 집단주의, 개인의 권리와 개성에 대한 억압의 합리화), 양치기의 '지도방침'에 대해 시비를 가리려는 양은 가차없이 축출해야 하고(지식인 박해와 표현의 자유 박탈 정당화), 암양은 군말 없이 숫양의 꽁무니를 따라야 하며(가부장주의와 반여성주의), 양들의 불복종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감시와 폭력적 처벌 시스템을 항속적으로 유지해야 하고(사상검증과 감시의 일상화, 국가 폭력의옹호), 양들이 '자랑과 기쁨'을 가지고 양치기의 '지도'에 순응하도록 집단적 과대망상을 주입해야 한다. (우월적 인종주의)

- 글은 말에 비해 더 진지하고 근엄한 것으로 간주돼왔다. 그러나 그간 글에 주어져 왔던 그런 우월한 지위는 이제 박탈되어 마땅하다. 글은 이제 더이상 지식인의 전유물이 아미녀, 활자화된 글도 이제 모든 대중이 주체로서 스스로 생산해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글과 말은 좀더 상호 근접할 필요가 있으며, 말로는 할 수 있었지만 글로는 그대로 쓸 수 없었던 이야기도 글로 쓰자는 게 내 생각이다. 
  표현의 자유에 불가피하게 가해질 수 밖에 없는 최소한의 법적 규제를 준수하는 선에서 글은 좀 더 자유롭게 말, 아니 생각까지 그대로 표현해낼 수 있어야 한다. 커뮤니케이션의 진정한 민주화를 이룩하고 삶과 커뮤니케이션의 상호 소외를 막기 위해서다.             <강준만,  지식인의 생명은 자기 성찰 중> 

- 진짜 자유주의자들의 글쓰기 (김정란 강준만 진중권..)

: '나'를 앞세워 글을 쓰면서 다른 지식인을 구체적으 지목해서 비판한다.....집단과 조직과 간판 뒤에 몸을 숨긴채 목소리만 들려주거나 누구를 가리키는지 특정하지 않은 채 추상적으로 특정한 사상이나 이론, 조지과 집단을 비판하는 것이 보통인 문화 풍토에서 '개인의 등장'은 새롭고 의미있는 현상이다. 자유주의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사회와 집단의선택과 책임을 줄이고 개인의 선태과 책임을 확장할 것을 요구한다.

:극우 파시즘과 사상적 친화성을 보이는 문화권력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동시에 좌파에 대해서도 극좌적 경향성을 비판한다.

:나름의 개성과 신념을 기반으로 '좌 우파 자유주의자들의 자유로운 연대'를 추진하고 있다.

- 경제학은 돈에 관한 학문이 아니라 인간에 관한 학문이다.

- 우리는 여러가지 형태의 '죄수의 딜레마'에 갇혀서 살고 있다. 그래서 이 모델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목격하는 갖가지 '멍청한 사태'의 원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대표적인 사례가 환경오염이다......이기적 개인의 '합리적 행동'은 환경 오염이라는 공동선의 파괴로 귀착된다.......이 비용을 '이타적 선호'를 가진 사람들만 치르게 하면서, 그 덕분에 개선된 환경의 혜택은 모두가 누리게 하는 것은 명백히 '경제정의'에 어긋난다.

- 우리의 민주주의는, '남'들은 가만히 있는데도 '나'는 싸워야 한다는 '미련한 선택'을 한 '비합리적인 인간'들의 피눈물(이것이 '비용'이라는 '천박한 용어'에 담긴 내용이다)을 자먹고 자란 나무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이 '미련한 인간들'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있다. 이 빚을 확실하게 같아야만 우리 사회가 또다시 파시증의 덫에 걸릴 경우 옛날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이 처자식의 앞날을 걱정하지 않고 기꺼이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투쟁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시장' 의 미덕과 악덕

시장과 국가는 서로 대립하면서 의존한다. 시장은 국가가 만든 제도의 틀을 벗어나 존재할 수 없으며, 자의적 규제와 개입으로 시장의 원리를 왜곡하는 국가는 몰락의 화를 피할 수 없다.

- 충족하고자 하는 욕망에 한계가 없는 것처럼 이윤 추구에 눈면 개인이 사용하는 수단 방법에도 한계가 없다.

- 시장경제는 내버려두어도 잘 번창하는 들꽃이 아니다.

- 재벌의 사업 맞교환(빅딜) 추진정책은 단기적으로 아무 효과도 없다...........부실기업과 다른 부실기업을 합친다고 해서 국제경쟁력이 높아지거나 일자리가 생길 리 없다.

- 정부는 가계의 소비 의사결정에 시시콜콜 개입하려는 쓸데없는 일을 그만두고 내수시장의 거대 경제주체답게 '큰소노릇'을 제대로 해야 한다. ..........가계의 소비를 촉진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정부가 대대적인 인프라 투자를 하는 편이 낫다.

- 불황기나 인플레 국면에서는 가계와 기업이 모두 한 방향으로만 달려가기 때문에 정부가 정반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 주십사하고 간청하고 싶다. 

- 누군가 하루저녁 내내 돈을 불사른다고 해도, 이 세상 전체의 부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돈 1달러가 재로 변하면 통화공급이 아주 조금 줄어들고, 경제 전체로 보면 물가도 감지할 수 없을 만큼이긴 하지만 분명히 하락한다. 이 사건으로 이득을 보는 것은 돈이 불타는 그 순간에 현찰을 보유하고 잇는 사람들이다. 1달러 지폐 한장을 불태움으로써 발생한 물가하락 덕분에 재산 가치가 늘어난 현찰 보유자의 이익을 모두 합치면 1달러를 불태운 사람의손실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랜스버그, 안락의자의 경제학자 중>

- 만약 누군가 1달러 지폐를 만들어 유통시켰는데, 그 지폐가 진짜 돈과 너무나도 똑같아서 아무도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눈치챌 수 없다면? 물론 사회 전체의 부는 증가하지 않는다. 통화량이 늘어나서 물가가 '감지할 수 없을 만큼이지만 분명히'  오르게 되면, 현찰을 가진 모든 사람이 조금씩 손해를 본다. 그 손해를 다 합치면 정확히 화폐위조범이 얻은 이익과 일치할 것이다. 화폐위조범은 현찰을 가진 모든 사람의 재산을 조금씩 훔치지만 사회 전체의 부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느다. ...................가장 완벽한 '화폐위조범'은 각국의 중앙은행이며, 그들이 화폐를 찍을 때마다 현찰을 가진 사람들은 손해를 본다. 

- 경제정책론의 영역에서 널리 통하는 상식에 따르면, 소수의 이익은 조직하기 쉬우나 다수의 이익은 조직하기 어렵다. 생산자의 이익은 조직하기 쉽지만 소비자의 이익은 조직하기 어렵다. 그리고 수출업자의 이익은 조직하기 쉬우나 수입업자의 이익은 조직하기 어렵다. 우리 언론의 환율보도를 보면 이 세가지 상식이 그대로 들어맞는다.

- 경제활동의 목적은 생산이 아니라 소비다. 생산은 어디까지나 소비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것은 저축이 '현재 소비의 포기' 이며, '미래의 소비' 를 위한 수단인 것과 마찬가지다.

- 소비가 생산의 목적이라면 수출의 목적은 수입이다. 수입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직접 생산하지도 않은 것을 소비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수입은 선이다. 반면 수출은 우리가 직접 만든 물건을 소비하지 않고 외국 사람에게 내주는 행위다. 수출 그 자체는 악이다. 수출이 선이 되는 것은 수출을 해야 수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출업자가 수입에 필요한 외화를 벌어옴으로써 '애국'을 한다면, 수입업자 역시 좋은 물건을 싼값에 사다가 소비자에게 공급함으로써 '애국'을 한다.

- 몇 %를 저축해야 과소비가 안 되는지를 '객관적으로'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국산품을 사든 외제품을 사든 소득에서 소비가 차지하는 몫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국산품 애용주의'는 한국의 기업이 손쉽게 소비자를 등쳐먹는 데 퍽 쓸모가 있는 이데올로기다. 수출 애국주의는 외환위기로 인한 환율 상승의 최대 피해자인 소비자들을 찍소리 못하게 만드는 수출업자들의 이데올로기적 무기다. .....이렇게 해서 다수의 이익은 무시당하고 소수의 이익은 효과적으로 조직되는 것이다.

- 공익의 극대화를 추구해야 할 정부가 이처럼 '잘 조직된 소수집단'의 작전에 놀아나서는 곤란하다.

- 정부가 올바른 태도를 국건히 견지하도록 도우려면, '조직되지 않은 절대 다수'인 소비자들이 수출업자의 이익을 경제이론으로 포장하는 일부 경제전문가들의 주장을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합법적 도박의 자유는 보장해야한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히 해야 할 것이 있다. 노름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노름꾼 스스로 처리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윤의 사유화와 손실의 사회화'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정부는 주식시장의 거품이 꺼지는 경우에도 절대 인위적인 증시 부양책을 쓰지 않을 것임을 미리 분명하게 선언해야 한다. ........자신의 노름빚(투자손실)을 정부가 책임지라며 항의시위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 '슬픔과 노여움의 1980년대'가 '정치적 냉소와 무관심의 1990년대'에 자리를 내준 이후, 젊은이들의 가슴속에는 이상을 향한 열정이 사라지고 대중적 스타와 세속적 성공에 대한 동경과 열망이 들어찬 것으로 보인다.  "잠자는 시간만 빼고 하루 종일 주식만 연구했다"는 이 야심만만한 청년의 포부를 나무랄 생각은 없지만, 주식시장과 펀드매니저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성찰도 함께 해줄 것을 권하고 싶다. 

- 모든 세대는 저마다의 운명이 있다. 그리고 같은 바람을 맞아도 사물이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듯, 같은 시대적 환경에서도 개인적 삶의 양상과 색채가 똑같을 수는 없다. 

- 오늘의 20대가 저마다 무지개처럼 다채로운 색깔의 삶을 개척해나감으로써 이 '21세기형 노름꾼'들의 좌절이 세대 전체의 운명을 어두운 단색으로 물들이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 경쟁을 외적 강제로 느끼는 생산자들이 그 압력에서 탈출하려는 욕망을 가지게 되며, 그래서 그냥 내버려두면 그들이 경쟁시장을 파괴해 버린다는 것도 인정할 것이다. 

- 정부가 신문사의 인사나 보도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정치적 부작용만 크고 효과는 없는 정책이다.  

- 문제는 노동운동을 '공공의 안녕과 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는 파쇼적 사고방식이다. .....국정원과 검찰 공안부 등 '합법적 폭력'을 행사하는 공안기관의 간부들이 기획예산처와 재경부, 노동부와 경찰청 간부들을 모아놓고 노동조합을 와해시키는 데 골몰하는 사회에서 '신노사관계'는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

- 시장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은 이런 식으로 조직된 중앙집권적, 과점적 의사결정 구조를 분권적 구조로 바꾸는 작업이다. .......상호지급보증 등을 통한 재벌의 금융자원 독점과 부당내부거래로 인한 경쟁 제한과 불공정 경쟁을 타파하고, 결합재무제표 의무화와 소액주주권 보호 등을 통해서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고,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촉진하려는 것도 모두 시장경제의 기본 원리인 경제권력의 분권화를 이루려는 것이 아닌가?

-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는 둘 다 분권적, 다원주의적 시스템이다. 경제권력의 집중과 정치적 민주주의는 조화될 수 없다.

-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정의에 따른면 재벌은 "복수의 시장에서 독과점 기업을 포함한 다수의 외형상 독립적인 기업을 총수와 그 가족이 배타적으로 소유, 통제하는 기업집단" 이다. 편법상속과 부당 내부거래 근절, 부채비율 감축, 책임경영과 무능한 총수 퇴진, 소액주주권 강화, 재벌의 금융기관 지배 억제 등의 개혁정책을 실질적으로 집행한다면 기존의 재벌체제가 그대로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하다.

- 용어를 가지고 다투는 것은 의미가 없다. 문제는 수단의 적법성과 실질적인 결과다.

- 투자는 이자율에, 그리고 소비는 소득 수준에 좌우된다고 본 것이다. ......기업의 투자결정은 이자율과 예상수익률, 현재의 경기상황, 그리고 미래의 경기에 대한 예측 등에 영향을 받으며, 가계의 소비지출은 현재의 소득과 자산의 크기, 미래소득에 대한 예측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 한시적 조치는 문제가 될 수 없다. 하지만 무작정 풀어버린 규제를 다시 도입하기는 어렵다. 이렇게 보면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취한 부동산 규제 해제가 현 정부의 집권 후반기에 원성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 상암동 월드컵축구 전용구장 건설 논란과 아파트 분양 과열 현상은 정책 당국자들의 무지나 착각이 문제를 더 악화시킬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무작정 대중의 정서에 영합하는 '허리띠 조이기' 논리나 시장마능 이데올로기에 휩쓸린 무분별한 규제 완화로는 위기를 탈출할 수 없다.

- 경쟁은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삼성자동차가 치열한 국제경쟁을 견디지 못하리라고 누가 감히 예단할 수 있겠는가.

  정부의 임무는 국제 자동차시장의 판도와 전망을 분석해서 삼성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삼성그룹의 총수가 자동차 회사를 만들면서 계열기업 주주들의 이익을 부당한 방법으로 침해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부당 내부거래나 불공정거래를 통해서 경쟁질서를 어지럽히지 못하도록 법규를 엄정하게 적용하고 처리하는 데 있다.................정부는 다만 그 과정에서 다른 이해관계자가 부당한 피해를 입거나 금융질서를 어지럽히는 불공정행위가 나타나지 못하도록 하고 이 회장이 실질적인 의사 결정권자로서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도록 하면 그걸로 그만이다. 

-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려면 지역주민과 기업, 지방자치단체, 정부가 모두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야 한다. 그러러면 우전 '김대중 독재자의 정치보복'이나 '부산 죽이기' 따위의 근거 없는 감정적 선동을 하거나 선동에 휘말리기에 앞서, 스스로 내렸던 선택에 대한 일말의 책임의식부터 표명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싶다. 

 

정치에도 자유경쟁을

3김 정치의 종말은누가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온다. 새로운 정치를 지향하는 이들이 걱정해야 할 일은 그 다음이다. 3김이 만든 선거연합이 그들의 퇴장과 더불어 허물어질 때 그 자리에 무엇을 어떻게 세울 것이며, 그걸 위해서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 낮은 투표율도 민의의 표현이라는 면에서 높은 투표율과 마찬가지로 존중받아야 한다.

- '권력의 생물학적 균형'이 깨진 것은 대통령이 나이가 많아서가 아니다. 정치제도와 풍토가 젋은 세대의 진출을 가로막고 있는 탓이다. 현역 정치인들만의 책임은 아니겠으나, 우리 나라 유권자들은 '좋은 정치'라는 공공재의 공급자인 국회의원을 뽑을 때 사적인 기준을 적요하는 습관이 있다. 지연, 혈연, 학연을 찾고, 평소 상가나 결혼식에 얼마나 열심히 얼굴을 내밀었는지를 따지며, 심지어는 공중목욕탕에서 등을 밀어준 '계획된 인연'에까지도 점수를 준다.
자기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해서 남의 눈치 보지 않고도 잘 사는 젊은이가 이런 분위기에서 선뜻 정치에 발을 들여놓기란 쉽지 않다.

- 지나치게 노령화된 정치권력의 '생물학적 불균형'을 바로잡을 필요성을 인정한다면 386 세대의 정계 진출은 바람직한 현상이라 하겠다. 문제는 그들을 둘러싼 정치적 거품이다. 기존 여야 정당들은 모두 뚜렷한 강령없이 특정 지역을 본거지로 삼아 생존을 지키고 민주적인 토론보다는 총재 개인의 지도력에 의존하는 '지역 선거연합'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정당들이 앞다투어 젊은 정치 지망생에게 손을 내민 것은 2000년 총선에서 젋은 유권자들의 관심을 잡아끌기위한 장식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 TK정서의 밑바닥에는 '때린 놈 콤플렉스'가 깔려 있다. 특히 독재정권에 빌붙어 출세를 했거나, 뇌물과 특혜를 주고받았거나, 패거리를 지어 남에게 못할 짓을 한 'TK 성골' 과 '진골' 일 수록 이런 콤플렉스가 심하다. 개인적으로 나쁜 짓을 한 적이 없는 대다수의 대구 경북 유권자들도 지역사회에서 이런 사람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기 때문에 이 콤플렉스에 감염되었다. 

- 대구 사람들은 목소리가 크고 성격이 급하며 충동적이고 고집이 세다. "말 많으면 공산당" 이라는 극우적 교시가 잘 먹히는 것도 이런 성격 때문이다. 또 비뚤어진 경우가 많지만 적어도 주관적으로는 의협심이 강하다.

- 문제는 김대중이 아니라 꼬치꼬치 시시비비를 가리는 사람한테는 승복하기 싫어하는 자신들의 기질에 있다는 것도 알 만큼은 안다.

- 문제는 오히려 사람들이 지레 겁을 먹고 정면 승부를 피한다는 데 있다. 예컨대 맨날 술 먹고 동네를 어슬렁 거리면서 광주에는 실업자가 없다는데, 하는 따위의 흰소리를 늘어놓는 자가 았으면 이렇게 면박을 줘야 하낟. "그라모 퍼뜩 광주 가서 취직하지, 니 와 그리 놀고 있노, 임마!" 이렇게 해야 알아먹지, 그렇게 말하는 근거가 뭐냐고 논리적으로 따져봐야 말짱 헛수고다.

- 부자는 '이대로!'를 외치고 가난한 이들은 길거리에 나앉는 이 삭막한 분열의 시대에..

- 사죄를 하지 않는 건 인간성이 막돼먹어서가 아니라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그는 그 자신과 똘마니들의 위기를 국가의 위기와 구별할 줄 몰랐고 자신의 똘마니들의 부귀영화를 국리민복과 구별할 줄도 모른다.

- 5.18은 우리 세대와 DJ의 '관계'를 크게 바꿔 놓았다. 전국 주요대학의 학생회 간부들의 휴교령이 내릴 경우 일제히 가두투쟁을 벌이기로 약속해놓고서도 광주 한 곳 말고는 그 약속을 지킨 곳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과 부산에서 시위가 일어났으면 광주가 그렇게까지 참혹한 보복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자책감이 1980년대 내내 우리를 짓눌렀다. 그리고 '광주만의 희생'에 대한 이 집단적 채무의식은 그 지역민의 한과 슬픔을 상징하는 정치인 김대중과의 역사적 연대의식으로 발저했고, 이것이 1987년 대선에서 학생운동권과 재야의 'DJ 비판적 지지'라는 정치적 연대로 표출되었다.

- 나는 무엇이 되느냐가 아니나 어떻게 사느냐를 중시한다.            <김대중>

- 절대권력은 반드시 썩는다.

- 남의 허물이 나의 알리바이는 아니다. 

- 이러한 '닮아가기 경쟁'에서 대한민국은 북한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어느것 하나 북한만큼 철저히 실행하지 못했고 또 성공하지도 못했다. 만약 대한민국이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승리했다는 '냉전적 표현'을 받아 들인다면 그 승리의 비결은 이 '닮아가기 경쟁'에서 패한 데 있다. 우리는 북한과 철저하게 달라져야 한다. 
 
- 우리 국민의 머릿속에는 체제경쟁이 '닮악가기 경쟁'이라는 사고방식이 뿌리 깊게 남아 있다. 북한 형법의 폐지를 국가 보안법 폐지의 전제조건으로 삼고, '국군포로' 송환을 '비전향 장기수 북송'의 조건으로 삼고, 북한 사뢰를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주체사상의 존재를 우리 사회에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알리바이로 삼는 논리는 바로 이러한 도착된 냉전적 사고방식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상대방의 잘못을 이유로 들어 자신의 똑같은 잘못을 정당화시키는 냉전적 사고틀에 갇혀 살았다.



낡은 권위와의 결별

사회 정의를 위해서는 전문성에 대한 근거 없는 미신을 뒤집어야 한다. 집단적 사익을 공익보다 앞세우는 '전문가' 보다는 공익을 추구하는 자세를 가진 '문외한' 장관과 국회의원이 나는 좋다.

- 무어소다도 위험한 것은 '결국 돈이구나'의 가치체계,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인간관, 시장논리와 부가가치론으로 사회를 운영하려 드는 초급 경영론적 멘털리티이다.

-  슬픈 일이다. 비판 논리를 끝까지 따라가보면 '아무도 더 행복해질 수 없고 누구도 더 불행하게 만들지 않는, 그러나 대다수가 불만을 가진 현재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 말고는 성난 교수님들의 마음을 풀어드릴 길이 없다.

- 물론 교육부 안은 최선이 아니다. 하지만 사업의 백지화는 국가적으로 볼 때 차선 또는 차악마저 배제하는 최악의 선택이다. 이 승리를 원하는 분들은 이렇게 자문해보셔야 할 것이다. "내가 속한 학문분야, 내가 몸담은 대학이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주로 대학원생을 양성하는 데 쓸 1조 4천억원의 인력양성비는 없어지는 편이 더 좋은가?"

- 대학의 특성화는 다양한 정책을 통해서 이루어나가야 할 장기적 과제이지만, 이런 식의 역할 분담에 국 공립 대학교수들은 아마 목을 내놓고 저항할 것이니 우리는 앞으로 오랜 기간 이 문제를 놓고 사회적 합의를 모으기 위한 토론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장기적 비전'을 1999년도 예산 2000억 원을 할당하는 기준으로 삼는 건 불가능하다.
교수대표체가 "교육부 안보다 100배는 민주적이고 효율적인 대안을 만들어 제시할 자신이 있다"는 것도안다. 하지만 이것을 실행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손 교수도 너무나 잘 아실 게다. ........ 안된 말씀이나 우리 대학교수들은 한 대학 안에서도 이해관계의 갈등을 조정하고 절충하지 못한다.

- 교육부는 방학책을 사실상 강매하여 번 돈으로 조직을 운여하는 교총의 불법행위를 오랫동안 눈감아 주었으며, 교총은 전교조 교사들을 학교에서 내쫓는 데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등 언제나 찰떡궁합을 과시해왔다. 교통은 교원단체이지만 교육 그 자체보다는 교원의급여와 지위 향상 등 사실상 노동조합이 해야 자연스러울 일만을 했을 뿐이다........투옥과 해직의 고통을 마다 않고 싸웠던 전교조가 애초 내세운 깃발은 '참교육', 다시 말해 교육개혁이었다. 이름은 노조면서 사실은 교원단체가 할 일을 떠맡고 나선 것이다.

- 노령교사들의 퇴임으로 절약한 예산을 가지고 수만 명의 젊은이를 채용하고 교육환경을 개선한다는 이른바 '경제논리'가 정년 단축의 요체는 아니다. 권위주의적이고 불투명한 학교 운영으로 교육현장을 질식시키는 학교 운영자와 모든 종류의 개혁에 저항하고 원래의 취지를 왜곡시키는 교육관료들을 물갈이하지 않고서는 어떤 교육개혁도 성공할 수 없다.

- 사실 정년 단축으로 물러나는 교사들은 대부분 교장과 교감 등 학교 운영자와 노령 교육관료들이다. 그들은 권위주의적 학교문화를 만든 책임자들이다....학교현장에서 다양성과 개성을 존중하는 민주적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다. "노련한 교사들을 학교 밖으로 몰아낸 교육 문외한 이해찬"을 비난한 젊은 교사들은 도대체 그 동안 교사들의 자주성과 권위를 억압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 대한민국의 어떤 사용자가 직원을 채용하면서 그 대가로 돈을 받는가? 사립 중 고등학교와 사립대학 재단 이사장들밖에 없다. 그것도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학교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말이다. .......거기에 한사코 반대하는 것은 학교 운영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 교직을 다양한 전문직종 가운데 하나로 간주할 경우, 차등적 보수를 비롯한 경쟁원리의 도입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선생님의 일은 아이들의 지적 성장을 돕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먼저 그에 필요한 전문적 능력을 키워야한다. 촌지나 체벌은 교육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전문직의 직업윤리에도 맞지 않는다.

- 아이들은 저마다 개성을 존중받으면서 정신적, 지적으로 성장하는 바로 그만큼 인격이 형성되기 때문에 별도의 '전인교육' 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성장하는데 필요한 지식과 경험을 얻는 여러 원천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선생님들에게 무한 책임을 지우고 아이들에게 무조건적 복종을 요구하는 '군사부일체'의 낡은 관념은 이제 벗어 던질 때가 되었다.

- 관점의 선택은 개인의 경험과 철학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 학교는 사회와 가정이 망가뜨려 놓은 아이들을 고쳐주는 애프터서비스 센터가 아니다. 선생님들이 그런 짐을 기꺼이 맡아준다면 고마운 일이겠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학교와 선생님이 아이들을 망가뜨리는 일이 없도록 반성하고 경계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 놀랍게도 "학생은 모든 형태의 신체적, 정신적, 성적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는 선언적 체벌금지 조항에 대해서 교사들이 모두 반대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나와 있었다.

- 이 문제를 공론화하는 그 자체를 '교원 죽이기'라고 비난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 나는 '교직은 성직 또는 천직'이라는 황당한 이데올로기를 거부한다. 개인의 직업 선택의 자유에 간섭하는 하느님은 어디에도 없다....아이들의 정신적 성장을 돌보는 직업이라는 자부심이야 아무리 존중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회가 교사를 특별하게 대접해야 할 이유는 없다.

-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교사의 권위를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교육전문가로서 지적 능력이며 아이들과 학부모는 우선 잘 가르치는 교사를 원한다. ....교사로서의 전문적 능력이 뛰어나면 권위는 저절로 선다.

- 아이에게 매 맞는 두려움을 주는 학교,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는 교사에게는 절대로 아이를 맡기지 않겠다. 

- 컴퓨터를 잘 다루고 인터넷을 자유자재로 드나드는 아이들을 보면서 흐뭇해하는 어른들이 많다. 착각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시대에도 핵심적인 것은 정보를 수집하고 판단하고 처리하는 능력과 그 정보를 활용해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다. 
  당면한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창의적인 방법을 찾아내고,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과 협력하고, 연대하고, 행동을 조직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많이 길러내는 사회만이 발전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 전문성은 필요하지만 전문성만 있다고 만사형통인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 사회정의를 위해서는 전문성에 대한 근거없는 미신을 뒤집어야 한다. 대학교수를 절대로 교육부장관으로 임명하지 말고, 법조 경력이 없는 법률전문가를 법무부 장관으로 발탁하고, 민간인을 국방부 장관으로 세우고, 건설업계에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이에게 건설교통부를 맡기자. 그러면 나라꼴이 지금보다는 훨씬 좋아질 것이다. 
  집단적 사익을 공익보다 앞세우는 '전문가'보다는 공익을 추구하는 자세를 가진 '문외한' 장관과 국회의원이 나는 좋다.

- '부패부등식(뇌물의 액수 > 적발되어 처벌받을 확률 * 처벌에 따른 손실액수)'의 좌변을 줄이기 위해서는 별다른 효과없이 공무원들의 배만 불려주는 쓸데없는 규제를 과감하게 줄여야 한다. 부등식의 우변을 줄이기 위해서는 시민단체의 주장처럼 조직 내부의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사람을 철저히 보호하는 법률을 만들어 부정이 적발될 확률을 높여야 하고, 적발된 비리에는 가차없는 처벌을 내려야 한다. 비용을 들이지 않고 우변을 키우는 방법은 '일벌백계'로 처벌에 따른 손실액을 대폭 높이는 것이다. 작은 부정에 대해서도 파면 등 중징계를 하고, 돈을 준 사람도 똑같이 처벌하고, 뇌물로 모은 재산을 한푼 남김 없이 몰수하는 법률을 만들어야 한다.

- 그러나 어쩌랴, 이런 법률을 만들어야 할 국회의원들이 이런 강력한 부패방지법을 원하지 않을 터이니 말이다.

- 변화와 변절은 다른 것이다. 맛이 가더라도 썩어 변질된 맛과 잘 익어 승화된 맛은 전혀 다르다. 내가 변하지 않았다고 보는 눈과 내 변화를 부정적으로 보는 눈. 이들은 사람과 세상을 진화, 발전하는 과정으로 보지 않고 완결된 고정체로만 본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 자기 관점 이외에는 모두 틀렸다고 보는 절대 유일의 잣대만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서로 통한다.          <박노해, 오늘은 다르게>

- 나는 박노해가 가졌던 사상에 반대한다는 것을 분면하게 밝히면서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글을 여러차례 썼다.
'나의 자유는 언제나 나와 다른 생각이 다른 사람의 자유를 의미한다.'는 진짜 자유주의자의 신조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 하지만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시민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행동은, 자기가 반대하는 사상과 견해를 가진 이가 그것을 표현했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을 때 거기에 대항해서 함께 투쟁하는 것이다.

- 표현의 자유를 전제로 한 '사상의 자유시장'없이는 '그릇된 사상의 도태와 새로운 진리의 발견'이 이루어 질 수 없다. 역사적으로 입증된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경쟁력'은 그것이 '사상의 자유시장'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충고는 매워야 제 구실을 한다는 생각 때문에 쫀쫀하다는 비난을 받는 한이 있어도 어쩔 수 없다. 지나간 한 시대의 상징적인 인물이 거품과 허세 때문에 스스로를 우습게 만드는 길로 빠져드는 것을 수수방관하는 것보다는 충고를 하느라고 욕을 먹는 쪽이 더 낫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박노해 시인이 과장된 감수성과 빛나는 어휘, 힘창 문장만으로는 남에게 '희망을 찾아주는' 감동적인 산문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란다.

- 우리는 조선시대 이래 새로운 사상적 조류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박해하는 전통을 가진 나라에서 살고 있으며 이런 전통은 국가보안법에 의해 면면히 계승되어왔다. '남녀상열지사'에 대한 탄압 역시 조선시대 이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이 전통 역시 '음란물'과 '미풍양속 훼손'을 단속하는 형법으로 계승되어왔다.

- '판매심의'의 주역이라는 교보문과 영업부 과장의 말이 재미있다. "랩을 씌워서 판매할지 여부는 출판사가 최종 결정하는 겁니다. 물론 책을 매장에서 팔고 안 팔고는 우리가 결정합니다." 인터뷰 기사는 교보문고를 상도덕에 투철한 건전기업으로 미화하고 있으나, 여기에는 무서운 진실이 숨어있다. 유통조직을 통해서 얼마든지 책의 흐름을 차단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서점이용자의 산 사람으로서 이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교보문고에서 책을 사고 안 사고는 독자가 결정합니다.
                  <월간 인물과 사람 , 최성일>

- 무슨 의도로 책을 썼는지가 도대체 왜 중요한가?............잘 나가는 전문의한테 인명을 구하려는 숭고한 사명감이 아니라 돈을 벌 목적으로 의사가 된 것이라고 비난한다면? 변호사더러 사회정의와 인권 실현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사법고시를 보지 않았느냐고 다그친다면? 동네 쌀집 아저씨더러 주민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벌 목적으로 쌀집을 열었다고 욕한다면? 기업인더러 고용 창출이 아니라 돈벌이를 위해 창업한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런 소리를 하다가는 아마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 대한민국에는 두 종류의 국민이 잇는가 보다. 하나는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는 미숙하고 우둔한 국민이요, 다른 하나는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것을 대신 판단해주는 검열자들이다.
   우리는 정말 '민주공화국'에 살고 있는가?

- 문제는 형평성이요 역지사지다........그렇지만 여성의 경우 특별한 배려를 해주어야 한다. 남성들은 자신들이 주도하는 사회적 질서와 도덕규범에 익숙하지만 여성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남자들이 오히려 더 엄격한 잣대를 자의적으로 휘둘러 '잘난 여자'들의 '옆구리'를 걷어차고 일부 '배웠다는 여자들'까지 여기에 가담하는 작금의 사태는 대한민국이 '야만문화의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음을 증명한다.

- 지성의 산실이라는 대학마저도 법률의 강제가 있어야만 마지못해 불합리한 제도를 고치는 참혹한 세상을 사는 것이 슬프다.


에필로그 
          다시 슬픔과 노여움으로

-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네크라소프>

- 나는 힘센 남자는 아니지만 일을 제법 많이 그리고 열심히 하는 편이다. 나이 마흔이 넘은 지금 나는 그 힘이 어디서 왔으며, 앞으로는 어디에서 인생의 에너지를 얻을 것인지 자문해본다. 어느정도 자의식이 형성된 스무 살 이후만을 본다면 내 삶의 에너지는 슬픔과 노여움, 그리고 부끄러움에서 나왔다.

- 슬픔과 노여움이 힘이 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부끄러움을 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갓 대학에 입학햇던 1978년 여름, 나는 구로공단 봉제공장의 내 또래 여성노동자들이 매주 60시간 넘게 일해서 받는 한달치 월급이 대학촌의 한 달 하숙비보다 적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 뒤로는 밥을 남긴다든가 여자대학 학생들과 그 당시 잘 나가던 <우산속>이라는 곳에서 단체 고고미팅을 한다든가, 첫시간 강의에 지각을 하는 그 모든 평범한 일에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어버렸다. 선배들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재판을 받는 걸 본 뒤로는 사법고시를 보려고 생각했다는 사실 그 자체도 부끄러워졌다.

- 프리랜서 또는 시사평론가라는, 자격증도 필요 없고 등단 절차도 없어서 누구나 마음대로 '참칭'할 수 있는 편리한 직업을 가진 지금, 나는 어떤 조직에도 속해 있지 않으며 어떤 운동에도 참가하지 않고 산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의 전부다. 20여 의 고민과 방황과 시행착오 끝에 찾은 이 직업 아닌 직업은 몸에 잘 맞는 옷처럼 편안하다.

- 통계청이나 국세텅에서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내 직업은 '지식 소매상'이다. 지식 소매업은 유통업의 일종이다 . 일찍이 묵가는 생산하지 않는 자는 먹을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건 백 번 지당한 말씀이다. 하지만 생산은 하지 않고 말만 많은 유가를 이 논리로 공박한 것은 온당치 않은 처사였다. 사회적 분업이 높이 발달하면 직접 땅을 갈거나 기계를 만지지 않고도 생산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는 지식과 기술이다. 사회에 필요한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는 사람은 최소한 남들만큼 또는 남들보다 더 잘 살 자격이 있다. .....누군가가 창조한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널리 퍼뜨려 많은 사람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지식 유통업자'도 마찬가지로 먹고 살 권리가 있다. 아무리 귀중한 지식이라도 몇몇 '전문가'들끼리만 알고 지낸다면 세상에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 나는 독자들에게 친절하고 서비스 좋은 '지식 소매상'이 되고 싶다. 남에게 신세지지 않고 한평생 살 수 있다면 끝까지 그렇게 살다 가고 싶다.

- 프리랜서의 비애는 먹고 살기가 힘들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프리랜서를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자기 검열'이다..........언론이라는 지식 유통업계에서 '왕따'를 당하지 않으려면 원고를 청탁한 신문사와 잡지사 기자들을 너무 난처하게 만드는 일을 되도록 삼가야 한다......문제가 너무 자주 생기면 밥줄이 끊어질 수 있다. 프리랜서의 자기 검열이 시작되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다.
posted by Dr.Hannah 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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